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닥터 와이 Apr 26. 2019

나쁜 소식을 전하는 방법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평범한 오전이었다. 나는 정규 교수 회진을 다 돌고 나서, 하루의 지시사항과 각 환자들에게 해당된 급한 일을 하나씩 명단을 열어 가며 해결하는 중이었다. 컴퓨터 의무기록 명단 중간쯤에 있는 어느 이름을 클릭해 여니 못 보던 팝업창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병리 결과 확인은 클릭!」


 "어? 떴네."


 화면을 본 순간 내 심장박동이 약간 빨라졌다. 거의 일주일을 궁금해하던 박 아무개 할머니의 병리검사 결과였다. 앞서 진행한 영상검사는 애매했다. 보통 암이라면 양성 병변과 달리 험악하게 생겼는데, 이 녀석은 순하게 생겼는데도 환자를 좀 심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의 암 확진을 위한 생검을 해야 했고, 그녀는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아 퇴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명: 박 아무개. 병리 검사 결과 (확진): 악성 상피종」


 "하아······. 역시나."


 나는 허리를 길게 하여 의자를 뒤로 해 기댔다.


 ‘그래, 양성일 리가 없지.’


 적인지도 모르고 낯선 이와 함께 한 긴가민가한 시간들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암과의 전쟁은 환자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싸움이 두려워 여러 번의 정찰과 정보 수집을 했지만 피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이제는 본격적인 선전포고를 할 때가 왔다. 싸움은 누군가가 더 많이 죽어 나가, 그가 패배를 선언할 때에나 끝이 난다. 그게 적이든 환자이든,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전쟁의 땅은 반드시 죽은 자의 배가 흘리는 진물로 황폐해진다. 죽은 자가 누운 땅은 연기를 피우며 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이제 암환자임을 확인했으니 기계적으로  '산정특례 신청'을 클릭했다. 우리나라 건강보험공단 의료비 지원안에 따르면, 암환자는 등록일부터 5년간 진료 및 치료 시 5 퍼센트만 부담하게 된다. 나의 이 클릭으로 그녀와 보호자들은 치료비 부담을 훨씬 덜 수 있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마땅한 처방을 다 끝내고 나는 재빨리 다음 환자에게로 마우스 화살표를 넘겼다. 새로 입원한 환자와 퇴원하는 환자들이 몰려 업무가 많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병동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간호사였다. 그녀는 약간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선생님 담당 환자의 보호자 한 분이 지금 제 앞에 서 계시고 바꿔달라 한다."라고 말했다. 당혹스러워하는 걸 보니 불만이 접수된 듯 했다. 아침 회진 때만 해도 불평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전화 바꿔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선생님,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박 아무개 할머니의 딸이었다. 아뿔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단박에 알아챘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요. 돈 적게 내고 그런 혜택 있다는 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암 있다는 말을 꼭 이런 식으로 들어야 하나요? 선생님과 이 병원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좀 실망스럽네요."


 이렇게 된 일이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쌓인 다른 업무를 처리하고 있느라 바빴고, 그동안 간호사가 산정특례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녀를 찾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보통은 "불행히도 암입니다."란 설명을 의사로부터 다 듣고, 슬퍼하며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야 암환자 등록 같은 행정 안내를 받는다. 이 날 따라 나와 간호사는 손발이 잘 안 맞았고, 나는 평소보다 더 굼떴고 간호사는 평소보다 부지런해 ‘암 진단’보다도 ‘암환자 혜택’을 먼저 전해 보호자에게 큰 충격을 줬던 것이다. 나는 즉시 그녀에게 "큰 상처를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 길로 병동에 달려가 환자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단지 '남의 마음을 중요히 생각하는 따뜻한 의사'여서가 아니다. 환자가 충격적인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앞으로 치료 예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처음 진단하고 선포한 의사에게 고까운 마음을 가져 불필요한 전원을 전전하다 치료시기가 늦춰지는 안타까운 일도 있고, 서운한 마음이 불신으로 이어져 환자가 치료 하나하나를 걸고넘어지기도 한다. 나쁜 소식은 최대한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의과대학에서는 '나쁜 소식 전하기'라는 교과 과정도 신설해 가르친다. 배운다고 바로 써먹을 수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우면 좀 낫다. 환자에게도 그렇듯, 모든 주치의도 급작스레 나쁜 소식을 배달할 일이 생긴다. 모두에게 마음의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은 없다. 병원이나 해당과 특성에 따라 주치의가 마음고생을 더 하는 경우도 있다. 내 의대 친구 하나는 국립 암센터에서 내과 수련을 받았는데, 병원 특성상 암환자가 내원 환자의 압도적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친구는 하루는 자기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적었다.「나쁜 소식 전하기, 그렇게 많이 했는데 할 때마다 너무 힘이 든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번은 외래 참관 도중 한 종양내과 교수가 나쁜 소식을 전하는 광경을 봤다. 그녀는 젊은 여자였지만, 나는 치료에 있어서 뿐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노련함을 목격했다.


 우락부락한 중년의 남자가 진료실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그녀는 “암입니다." 라고 선언했다. "좋지 않습니다. 오래 사시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야말로 죽음의 선포. 이런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바닥이나 컴퓨터, 문서를 보는 등 환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처음 말부터 끝까지 그녀의 눈은 환자를 향하고 있었다. 혹여나 있을 좋은 일을 기대하게 하는 혀놀림도 없었다.


 그렇게 바짝 말라 건조한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환자의 마음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환자가 울음을 터뜨리자, 환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는 손에 뽑아 쓰는 휴지를 짠 하고 내보였다. 잘 보니 사방팔방 팔이 닿는 모든 반경 안에 휴지 갑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손놀림 하나 말 하나가 환자가 적절히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일했다. 모든 방식과 도구가 환자의 마지막을 위한 최고의 예법이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그 정도의 노련함을 이룰 수는 없다. 수 없이 환자의 눈물을 보고, 그들의 셀 수 없는 죽음을 지켜보며, 무딘 칼로 머릿속에 꾹꾹 눌러 힘들게 새긴 기억이 없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그녀가 대단해 보였던 이유는, 자신이 환자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지를 신경 쓰지 않은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의사는 궁극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의료는 기본적으로 서비스직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를 만족시키거나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 병을 가진 환자에게 치료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몸이라는 큰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 현재로서 가장 최선의 선택지를 제공하는 일, 그것이 우리 일을 숭고하게 만들고, 의료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한다.


"암입니다." 의사는 죽음을 선포했다.


 나의 경우는 어땠는가. 나 역시 힘겨워하며 많은 나쁜 소식들을 전해야 했다. 그중 한 번은 꽤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있다.


 속쓰림으로 내원한 3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내원할 때부터 최대한 빨리 내시경을 받고 싶다고 재촉하고, 입원 권유하는 의료진에게 집에 아이 둘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퇴원을 조르던 환자였다. 그런데 내시경 결과는 진행성 위암, 영상 검사상 전이까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예후가 나빠 수년 내 사망할 수도 있는 타입이었다.


 나는 바로 환자에게 전할 수 없었다.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젊은 사람의 암은 항상 그 안타까움 때문에라도 똑바로 보고 있기 쉽지 않다. 나는 그녀의 보호자를 먼저 찾아봤다. 하지만 다들 같이 오기 어렵다고 했고, 특히 남편은 일 때문에 너무 바쁘다고 했다. 그녀는 괜찮으니 자기에게 말하라고 했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 어렵게 사실을 전했다.


 "예후가 나쁜 진행성 위암입니다."


 그녀 곁에는 다섯 살 남짓의 딸이 같이 있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며 어린 딸의 조그만 손을 꼭 잡았다. 딸은 "아- 엄마- 아파-." "엄마 젤리 더 줘." 이런 말들을 큰 소리로 칭얼대며 졸랐다. 그녀는 이로 입술을 깨물고 잠자코 내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딸아이의 손을 잡았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하며 눈물을 참았다. 그녀는 지금 딸을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자기감정을 이기려 드는 드문 광경이 마음아팠다. 그녀가 자기 내면과 싸우는 모습이 내 감정도 크게 흔들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자식 앞에서 큰 엄마로 남으려는 모습 앞에 나 역시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세하게,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것, 심지어 내가 알았던 모든 감정의 기억까지도 그녀에게 소상히 풀어놓았다. 환자가 걷는 길이 얼마나 아플지 공부해서 아는 사람으로서 그녀가 앞으로 겪을 모든 고통과 슬픔과 행복을, 조금일지언정 가늠하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최선이었다.


 병실 창문 밖으로 듬성듬성 잎이 달린 나무가 흔들렸다.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Photo by: Maria Teneva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가 다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