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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Mar 25. 2018

포청천의 전조에게 쓴 중국어 팬레터

중국어, 어떡하면 잘할 수 있나요?



내가 중국 영화와 무술에 빠져 있으니 성룡이나 이연걸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지만, 사실 나를 무술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표협 "이라는 무협 드라마이다. 대만에서 50%를 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대박 드라마였고 한국의 비디오 가게에 수 십 편으로 구성된 무협 시리즈 코너에서 빌려 볼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표협 폐인'이 되어서, 봤던 것을 보고 또 돌려 보고, 대사를 다 녹음해서 밤새도록 듣고 또 듣고, 나중에는 비디오 전집을 구해다 소장까지 했으니 열다섯 살의 나는 퍽이나 열렬한 팬이었다. 이 드라마에 내가 푹 빠진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배우, 포청천의 전조로 우리에게 친숙한 ‘하가경’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나와 같은 시대를 공유하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 그 잘 생긴 사람?’ 지금은 60을 바라보고 있지만, 게다가 우리 아빠랑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여전히 전성기 시절의 꽃미모와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로 SNS에 출몰하여 나를 설레게 한다.


표협의 주인공, 곽욱 역을 맡았을 때의 모습. 이 드라마를 보고 무술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고, 간절히 바랬더니 진짜 이루어져 중국으로 무술유학까지 가게 되었다.




흔한 스토리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일본어를 배운다거나, 케이팝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래서 중국어를 꼭 배워야 했다. 그냥 단순하게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가 표협에서 했던 대사들을 꼭 중국어로 알아들어야 했다! ‘맙소사’ ‘어째서지?’와 같이 완곡한 표현으로 의역된 자막 때문에 그 정서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마치 이것은 톨스토이의 작품을 원문 그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러시아어를 배운다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숭고한 일이었다. 학창 시절이었으니, 국영수 학원비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중국어 학원을 보내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EBS에서 하는 중국어를 챙겨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한국에서 아무리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을 쳐도, 단순한 인사말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진짜 무술을 할 기회가 생겼고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중국에 몇 년 동안 있으면 다른 건 몰라도 중국어 하나는 끝내주게 잘 배워 돌아오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싸스(SARS:2003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때문에 중국 전역이 난리가 났었다.) 때문에 어학연수 기간을 놓치면서 입을 못 뗀 채로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학기 초에 친구들이 저마다 들뜬 신입생 기분으로 친구를 사귀어 갈 때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공포감에 더욱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중국어로 된 대학 교재 밑에다 한국어 뜻 찾아 적기 바빠서 중국어 공부를 따로 할 틈도 없었다. 특히 외국 생활하면서 한 번쯤 겪는다는 ‘전화 공포증’ 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는 손짓 발짓을 해서라도 의사전달을 하는데, 전화 통화를 하면서 한 번 맥락을 놓쳐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웬놈의 중국어 전화는 그리 많이 걸려 오던지. 어떻게 내가 중간고사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가까스로 통과를 하고 한 학기가 지난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너무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중국 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대화밖에 못하는 나는 중국 친구들에게는 마치 유치원생 수준의 친구 같았을 것이다. 한국 유학생이라고 특별히 다가와 주는 착한 친구는 많았지만 나 스스로 주눅이 들어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유학 갈 때 비행기에서 소망한 것의 반만 이뤄도 성공한 것 이라는데, 원래 나의 소원은 중국 아이들을 다 제치고 과톱을 하여 한국 유학생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제발 60점 과락만 넘기게 해 주세요’ 라며 기도하는 꼴이었다. 정신없던 중국의 1학기를 마치고 한국 집에 와서, 중학생 때 사 둔 표협 비디오 전집을 다시 돌려보았다. 그래도 예전보다 몇 마디 더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다시금 결심했다. 4년 과정이라고 여유롭게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중국어 공부를 해 보자고. 사실 중국에서 유학하면서 매일 한인촌에 가서 한국음식 먹고 한국 친구들과 한국말만 쓰면 몇 년이 있어도 중국어를 유창하게 못 한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이 뉴스에 크게 보도가 되기도 했다. 나도 안일하게 6개월을 있어보니 중국에서 세월을 보낸다고 말이 느는 게 아님을 절실히 깨달았다. 친구들이랑 말도 해야 했지만, 죽기 전에 표협을 자막 없이 들어보고 말리라는 가슴 뛰는 목표가 생겼다. 그때부터 나의 중국어 공부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 입학할 때 면제가 되었던 중국어 능력 시험인 HSK를 등록하였고, 중국에 있는 동안 고급 중국어를 따기로 결심했다. 사실 중국어 성적은 나에게 필요가 없었지만, 자격증 시험이 아니면 공부가 느슨해질 것 같았다. 이 즈음 읽었던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에서 코피 터지도록 HSK를 준비하며 중국어 공부를 하는 장면과 홍정욱의 ‘7막 7장’에서 하루에 200 단어 외우는 모습이 나의 공부 습관을 부추겨 주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무섭게 공부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중국어 학원을 다녔다. 주말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에 11시간씩 틀어박혀 공부했다. 도서관에 자꾸 출몰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중국 아이들은 내가 보는 중국어 문제집의 문법과 고어古语 들을 보며 자기들이 문제를 풀어도 못 맞출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중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때는, 놀 때도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서 안심이 되었다. 문법은 아무리 공부해도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어서 말하기와 작문 수업만 줄기차게 듣고 단어 외우는 데에 치중했더니 감이 잡혔다. 중국의 TV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가 유행했는데,  밤마다 한국 드라마를 더빙하여 방송해 주곤 했다. 그때 몇 번을 반복해서 보았던 것이 ‘인어아가씨' 다. 성우들의 정확한 발음과 중국어 자막까지 더해져 보니 표현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라 더 재밌기도 했고 한국에 대한 향수도 달랠 수 있었다. 노트를 준비 해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노트에 갈겨 적은 후, 나중에 뜻을 찾아 정리를 했다. 이것이 말하기 실력을 부쩍 늘려주었다. 점차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해도 교수님 말씀이 귀에 들어왔고 각 지방의 아이들이 하는 방언도 대충 흐름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학 초창기에는 한국 학생을 비꼬는 일부 아이들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였지만 나중에는 ‘예전에 한국이 중국의 부속 국이지 않았냐'며 아무 생각 없이 이야기하는 아이에게 ‘그래서? 너네 나라가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못 살잖아' 라며 톡 쏴 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속이 시원하다. 늘 어리숙해 보이는 내가 한 마디 하자 그 친구도 어이없는 표정만 지었다. 자기 부모와 자기 나라를 욕하는데 가만있으면 바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고 나서야, 중국 친구들 속으로 들어가 제대로 된 중국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잊고 지냈던 하가경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꽤 많은 사진과 일기로 그의 근황을 이야기해 주었고, 신포청천에서 또다시 전조 역을 맡았다고도 했다. 하가경이 쓴 중국어 일기는 나에게 또 좋은 중국어 교재가 되어 주었다. 매일 구독하며 그가 쓰는 모든 단어를 모조리 공부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며 나는 하가경 블로그에 비밀글로 팬레터를 쓰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당신의 팬인데, 포청천과 표협을 보고 우슈를 했고, 중국어를 했고,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우슈 국가대표까지 되었노라고.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니 감사하다고. 그때 쓴 나의 편지는 더 이상 유치원생의 것 같은 중구난방 글이 아니었다. 감사와 진심이 듬뿍 묻어 난 편지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가 내 블로그에 방문한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그동안의 피눈물 나는 고생이 이 하나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기억하시는 분? “개작두를 대령하라” “웨이~ 우~” ㅋㅋㅋ



중국이 떠오르는 나라이니 중국어를 배워두면 유용할 것이라는 이성적인 말은 소용없다. 중국의 가능성을 보고 앞으로 쓰일 곳이 많다는 이유로 중국어를 배웠다면 이렇게 온 힘을 다해서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성적인 접근으로 피 나는 노력을 하려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집중해서 혼신을 다 할 수 있는 일이 몇 번 없다. 나는 우슈가, 중국어 공부가, 쇼핑몰 일이 그랬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중국어로 이해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시작했지만 온 몸을 불살라할 만큼 열정적으로 덤벼들었다. 어떤 사람은 게임에, 어떤 사람은 야구에, 또 어떤 사람은 연예인에 빠져서 늘 그 생각만 하고 그 생각을 하며 행복해한다. 정말 좋은 현상이다. 이런 열정이 바로 젊음이다. 다만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끌고 가는 전략은 필요하다. 만일 내가 엘리트 체육에 입성하지 못하고 무술 하는 도사님을 찾아 산속으로 갔다면? 무협드라마만 줄기차게 보는 데 그쳤다면? 인터넷 중독으로 밤새 컴퓨터만 잡고 있었으면?

한 가지 일에 푹 빠져서 몰아지경이 되는 기쁨은 느껴 본 사람 만이 안다. 기왕이면 중독처럼 몰두해 있었던 일이, 정신 차리고 보니 허무한 일이 아닌 보람차고 뿌듯한 일이 되는 일. 앞으로 살면서 이런 큰 열정을 쏟아부을 일이 얼마나 더 생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찾아서 만나면 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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