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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엉군 Jul 07. 2020

약자를 대리한다 vs. 대표한다

NGO 존재의의


상반기 내내 'NGO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럴 연차이기도 했지만 정의기억연대 사태도 한 몫 했다. 수혜자, 목적사업, 과잉대표, 투명성 등 질문이 꼬리를 물었고 6월 한 달간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그 중에서 조효제 교수가 편역한 'NGO의 시대' (2000, 창작과비평사)는 좌우 모두의 시각에서 균형감있게 NGO를 설명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턱에서 토해낸 성찰들은 비판적이고 명철했다. 20년이 지난 오늘, 그 성찰에 비추어 NGO를 바라보며 잊지않기 위해 정리해둔다.



약자를 향한다



필자는 애너 바킬(Anna Vakil)의 정의를 받아들여 NGO를 "약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목적을 지닌 자율적, 사적, 비영리 단체"라고 정의할 것이다.

- 피터 반 토이질 ("NGO와 인권", p.69)


가장 크게 다가온 키워드는 '약자'였다. 수혜자란 표현이 일상화 되었던 내게 '약자'란 언어는 NGO의 존재의의를 리셋하는 느낌이었다.


약자는 누구일까? 아동, 장애인, 난민, 이재민, 성소수자, 피해자 ... 간단히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제도권 밖의 사각지대에 위치하거나, 제도권 내에 있더라도 역학관계상 상대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이들이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약자의 개념은 인간을 넘어선다. 환경주의자들의 노력으로 동물, 식물, 하천, 공기, 숲, 늪지 등 자연환경도 포함됐다. 그렇다면 약자의 범위는 넓어진다. 인간 사회와 연결되어 있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존재들까지 포섭되는 것이다.


요는 NGO는 어떤 방법론을 택하던 간에 이러한 약자들의 삶과 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과 그 곳에 이르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단체의 비전과 미션에 따라 저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수혜자가 아닌 '약자'는 NGO의 개입으로 어떤 존재로 거듭나야 하는 걸까? 강자와 약자의 중간에는 어떤 정거장이 있을까? 수동성과 능동성의 전환을 넘어 어떤 주체를 지향해야 하는 걸까? 이 또한 질문이다.



대리인인가 대표인인가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불거질 때 일각에서는 '과잉대표' 문제를 제기했다. 과잉까지는 그렇다쳐도 '대표'가 맞는 표현인가 싶었다. 약자들의 대표는 약자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약자와 동일한 특질과 표상을 가진 집단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대리인에 머물러야 한다.


NGO에서 자주 듣는 개념 중 하나가 '청지기(steward)'다. 청지기란 주인의 뜻대로 관리한다는 개념으로 보통 기부금에 대한 윤리적이고 투명한 자세를 강조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후원자를 향한 마음가짐이다. 약자를 향한 마음가짐은 아니다.


약자를 다할 때 요청되는 마음가짐과 정신은 무엇일까? 그들의 권리와 존엄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계몽가인가? 시혜자인가? 혁명가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구하지 않는다면 규모를 갖추고 이름을 얻은 단체는 오만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체 대표인에 머물러야 하는데 선을 넘어 약자의 대표인으로 행세하는 순간 약자와의 관계는 틀어질 수 밖에 없을거다. 지지받지 않은 대표성은 공격받을 수 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제도정치의 관료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제도정치로부터 배제' 되면서 대안적 조직형태로서 시민단체와 NGO를 선택하고 형성해 온 것이다. 즉 이들에게는 '배제의 조건'이 철회된다면 그것은 바로 '참여의 조건'이 된다.

- 정종권 ("한국 시민운동을 비판한다" p.122)


단체의 지도자들은 정치인과는 달리 선거유세를 할 필요도, 공식 직책을 맡을 필요도, 납세실적을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도, 재선을 위해 출마해야 할 필요도 없다. ... 국민국가에 대해 가능한 유일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시민사회의 정체는 바로 이처럼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비민주적인 단일의제 집단 무리들인 것이다.

- 데이비드 리프 ("시민사회의 가짜 새벽", p.110)



약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NGO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비전이라고 한다면, 비전의 상당부분은 '약자'에 대한 관찰과 이해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처음 NGO나 비영리단체를 설립한 초기 멤버들에게는 그 관찰과 이해가 있었을테다. 그리고 지금도 일선에서 약자를 만나고 대화하는 현장의 활동가들은 매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 있을테다.


하지만 현장이 아닌 사무실은 어떨까? 약자와의 대화보다 후원자, 관계자, 언론, 대중과 더 긴밀히 소통하는 지원부서에게 약자의 니즈는 명확하게 전달될까? 대중성과 근접성이라는 기준으로 약자의 언어는 번역되고, 전문성과 효율성이라는 조직의 논리로 우선순위가 조정된다면... NGO는 약자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라 논리정연하고 구구절절해도 약자를 만난 적 없는 활동가의 활동은 위선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반대라고 늘 정답은 아니다. NGO는 참 어렵다. 확신이 들거나 아무 것도 모르겠을 ,   다시 '약자'에서 출발할  있기를 ... 바랄뿐이다.


NGO 약자를 향하지 않는다면, 그저 이익집단일 뿐이다.


From Ethiopia



NGO는 1) 국가가 할 수 없는 것을 '감시'하고, 2) 국가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주창'하며, 3) 국가에 모자라는 부분을 '혁신'하고, 4) 국가가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행동할 여력이 없는 부문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Najam. 1999)

- 조효제 ("참여의 예술, 변혁의 과학"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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