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을 돌아보니 이상하게도 대변 활동이 없었다. 매일 아침 쾌변이 몇 안되는 내 장점이었는데 그게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거다. 그래서 오늘은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변기에 앉아있었다. 그랬더니 다행히도 다시 장 운동이 시작됐다.
이건 소름 돋는 발견이었다. 똥 싸는 법을 잊다니... 그도 그럴 법한게 코로나 3일째까지는 계속 비몽사몽이었다. 뭔가를 생각으로 포착하면 그것이 꿈으로 펼쳐졌다. 이를테면 '토끼'를 생각한 순간, 토끼가 깡총깡총 숲으로 뛰어들며 꿈이 전개되는 거다. 이런 비몽사몽이 3일간 이어지는데 3일째 밤이 절정이었다. 그 꿈이 너무나 얕고 선명하게 전개되어 10분 20분마다 깨곤 했다. 그러면서 목은 벌에 쏘인 것 마냥 땡땡 부어올랐다.
똥을 싸고나서 침대가 아닌 바닥에 앉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을 느끼며 푹신한 침대를 바라보았다. 간디 형님이 그랬다. "침대에 있는 시간은 죽어 있는 시간이다." 실로 침대에 있었던 지난 3일은 죽어 있는 시간이었다.
문득 나는 델타 변이 코로나19에 걸린 사람들의 공포가 상상됐다. 치사량 높은 이전 코로나19 변이에 걸린 환자들은 중증환자 병동에 누워 산소호흡기와 의료기기에 둘러쌓인채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공포를 겪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자연히 건강하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전에 무릎 수술을 하고 2개월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우연히 새벽 라디오 방송에 이끌려 유서를 쓴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사회생활을 하기 전이라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감사를 전했다. 그 때는 심플했다. 일하기 전이었고 홀홀 단신이었으니까.
20년만에 자가격리를 통해 다시 죽음을 바라본다. 예전만큼 심플하진 않다. 직장에 일에 벌이에 가족에... 하지만 죽음은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심플하게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