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나는 국제경영학을 전공했는데 같은 과의 국제 학생 친구들과 한국 친구들은 영국에서 취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경기가 좋지 않아 영국에서도 취직은 쉽지 않았지만 떨어지면 원서를 넣고 또 넣기를 반복하여 간간히 런던에 있는 크고 유명한 회사에 취업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영국에서 취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몇 년 전에 영국 생활을 해본 나로서는 영국에서 사는 건 외롭고 우울하고 적막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귀국했다.
영국에서 학위를 따는 1년 동안 정말 많은 돈을 썼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직장을 알아보았다. 나는 이제 기업체가 아닌 연구기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협력업체 그리고 다른 부서들과 정신없이 전화 통화하고 매일 수십 통의 이메일을 보내고 또 회신하며 혼이 빠진 사람처럼 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구직 사이트에서 환경부 산하 연구기관의 연구원 채용 정보를 발견했다. 나는 바로 지원해 보기로 했다. 나는 기업의 국제환경전략에 관한 석사논문을 쓸 정도로 평소에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여러 명의 지원자가 있었지만 나는 합격을 했고 바로 출근을 했다.
나는 환경기업실에 소속되었다. 나에게 당시 환경부에서 추진 중인 '기업이 친환경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를 관리하는 업무가 주어졌다. 그 제도를 국내 기업들에게 알리는 책자를 만들고 기업들이 그 제도의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업무이다. 한 가지 더, 우리나라 기업들이 EU국가에 진출을 하려고 할 때 이 제도의 인증을 받으면 EU에서 받아야 하는 환경인증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업무까지 추진해야 했다.
친환경기업으로 인증을 하는 그 제도는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했다. 내용을 읽어서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환경과 관련된 전문용어와 오염 물질에 대한 화학 용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어 문과 출신이면서 환경과 관련된 전공을 하지 않은 나에게는 외국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환경공학을 전공한 직원과 팀을 이루어 나는 제도의 정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부분을 맡고 그 직원은 정량적이고 환경 관련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 부분을 맡아서 책자를 발간했다. 그럼에도 책자를 발행하는 동안 정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스트레스가 없고 업무에 공부(연구)가 필요한 직장을 원해서 연구기관을 선택했는데 스트레스가 없는 직장은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6개월쯤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실장님께서 독일로 출장 가서 EU의 환경인증제도와 우리 제도와의 업무협약을 좀 더 추진하고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것은 지난 몇 개월간 내가 독일의 환경부 담당자와 이메일로 업무를 추진했지만 크게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직접 만나서 회의를 열어 설득하면 좀 더 업무가 추진이 되지 않겠냐는 실장님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팀장님은 나에게 해당 제도를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독일에서 발표를 하라고 하셨다. 프레젠테이션이야 만들겠지만 발표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입사한 지 이제 6개월 남짓되었고 나는 이 분야의 경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제도에 대한 이해와 배경지식 그리고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발표의 목적은 상대의 설득인데 이렇게 부족한 경험으로는 설득력 있는 발표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부분을 팀장님께 피력하자 다행히도 발표는 본인이 하신다고 했다. 애초에 나에게 발표하라고 한 것은 농담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대신 나는 우리나라의 제도와 EU제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표를 아주 열심히 만들었다.
독일로 출장을 가는 사람은 우리 연구원에서는 나와 팀장님, 환경부에서 관련자 한 명, 환경공학과 대학 교수 한 명, 지방의 환경청 직원 한 명이었다. 독일에 도착한 다음 날 쌀쌀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우리 일행은 독일의 환경부 건물을 찾아갔다.
다른 일행들은 평소 하던 업무의 연장이었겠지만 주로 전시회 참석 위주로 출장을 다녔던 나는 업무의 내용과 성격이 매우 다른 이번 출장에 매우 긴장을 하고 있었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독일 환경부에서도 여러 담당자들이 와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한국인 동시통역사들이었다. 독일 환경부에서 통역사를 부른다고 해서 마음 편히 출장 준비를 했었는데 순차통역도 아닌 동시통역사들을 부를 줄은 몰랐다.
나는 회의의 분위기가 보다 더 공식적으로 느껴졌고 부담스러웠다.
거의 3시간에 가깝게 진행되었던 회의가 끝났다. 나는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업무의 담당자이면서 출장보고서를 작성해야 했기에 회의의 내용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듣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독일과 한국의 관련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옥상과 비슷한, 건물의 일부가 외부로 노출된 곳이었는데 독일 환경부의 나이가 지긋한 중역 담당자가 나에게 오라며 손짓했다. 가보니 그는 건물의 밖 바닥을 가리켰다. 독일 환경부 건물 바로 앞 바닥에 폭이 10cm도 넘는 굵은 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동독과 서독이 통일되기 전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독일의 옛 모습처럼 분단된 상황이어서 한국인인 나에게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분단되었던 역사를 유적지로 남기고자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곳을 없애지 않고 남겨둔 것이었다.
역사적 현장에 있다는 뿌듯함과 함께 독일과 달리 아직도 분단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긴장을 많이 했던 출장은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고 나는 일상 업무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했다. 출장을 갔을 때 남자친구와 신혼집을 둘러보고 계약을 할 계획이었는데 출장 일정 때문에 나는 신혼집을 보지도 못하고 시어머니와 남자친구가 계약을 했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남자친구는 화성에서 근무를 하여 신혼집은 그 중간인 광명에 마련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도 계속 직장을 다닐 계획이었다.
결혼을 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나 임신을 했다. 입덧이 심하여 음식도 잘 못 먹고 출근하며 구토하는 일도 있어서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출퇴근을 했다. 연구원에서의 근무도 쉽지 않았다. 밤에 충분히 잤음에도 불구하고 졸음이 와서 근무에 집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낮에 못한 업무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야근을 좀 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에게 많은 업무가 지워졌다. 다른 직원이 퇴사를 했는데 그 직원의 업무를 다른 직원과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신한 직원에 대한 배려는커녕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밤 10시가 넘는 야근이 여러 차례 지속되자 남편도 화가 치밀었다. 어느 날은 광명에서 서울로 나를 데리러 차를 끌고 오기까지 했다. 그날 실장님을 만나서 따지려고 했다는데 실장님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그렇게 힘든 직장생활을 이어왔고 나는 어느덧 임신한 지 7개월째가 되었다. 배가 많이 나왔고 쉽게 걷기 어려웠다.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처럼 실장님에게 업무 보고를 하러 실장님 자리로 갔다. 실장님은 내 업무 보고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의 앞에 있는 유선 전화기를 집어 들어 자기 책상에 냅다 던져버렸다.
"쿵"
실장님은 조직 내에서 원래 괴팍하고 성질이 나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여자 직원이든 남자 직원이든 가릴 것 없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류든 신문이든 컵이든 자기 눈앞에 보이는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며 반말에 비속어까지 사용하며 소리를 고레고레 질러대는 사람이었다.
그날의 전화기 던지는 행동에 나도 깜짝 놀랐지만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뱃속에 있는 아기가 큰 움직임을 보이며 놀랐다는 것이다. 나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 이 사람 때문에 우리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책상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다른 부서의 여자 직원이 내게 오더니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저 실장, 조심해요. 몇 년 전에 여자 직원 2명이나 유산시킨 사람이에요."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같은 여자로서 배려는커녕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져서 여자 직원을 유산까지 시켰다고? 실장님은 여자였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내 아이를 건 위험이라니! 남편과 의논하여 퇴사를 결심했다. 당연한 결심이었는데 그 결심을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속상했다.
길고 긴 여정을 거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들어간 그 연구기관에서 나는 그렇게 쉽게 퇴사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곳은 결국 나의 마지막 직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