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담다(2022.11.2)

어머님의 목소리가 어쩐지 부드럽다.

by 소국

오후 3시쯤 어머님이 연락이 오셨다.

<어멈아 조금만 일찍 올 수 있니>

일찍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그렇게 빨리 못 간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갓을 절여놨는데 김치 좀 담그려고 그래> 하신다. 그때부터 다시 우울모드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철이 없는 건지 김치 담근다고 하니 이토록 일을 했는데 또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울분이 솟구쳤다. 그래도 통화 중에는 최대한 날이 서지 않은 감정으로 담담하게 말씀드렸다. 대답을 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몇 시까지 도착할 수 있겠다고 말씀드렸다.


하. 며느리 모드. 너무 힘들다. 정말 너무 힘들다. 잇몸에 염증이 나서 언제 터질지 몰라 부어오른 잇몸을 만지작거리며 하루 종일 버텼다. 피곤해서 아침에 알람을 끄고 1시간이나 더 자고 나왔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나의 몸뚱이와는 관계없이 <우리 어머님은 갓이 더 중요하다. 고들빼기가 더 중요하다.> 이 사실이 속상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나만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머님은 이걸 일하는 며느리랑 하기 위해 죽어라 갓과 고들빼기를 밭에서 가져와서 다듬고 씻고 절였을 것이다.(여기서 내 의사는 들어가지 않지만, 그냥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할 뿐이다. 좋은 거 식구들 먹이고 싶은 마음 정도일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어머님 고생하셨네요 덕분에 한결 쉽게 김치 담그네요> 이 말이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심신이 지치니 어머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색이 어두워져 집에 도착했고, 남편에게 얼른 애들 좀 보라고 했지만 이미 날 선 목소리에 남편이 내 말을 들을 리 없다. 남편은 그저 묵묵히 김치 담그는 것을 옆에서 돕다가 몇 마디 하더니, 이방 저 방을 배회했다.


참. 나란 인간도 잠시 쉬었다가 하면 될 것을. 기어이 빨리 끝내겠다고 하다가 괜히 남편한테 날 서게 대한 것 같아 미안하다.


오늘 오전 9시경 갑자기 실장님한테 카톡이 왔다. 힘내라고.감동의 쓰나미가 따로 없다.


<힘을 내요 힘을 …! 힘든 시간도 다 지나가고 잊힙니다. 남은 11월은 나를 챙겨주는 시간을 가져요. 주변 둘러보며 힘들게 버티지 말고 나를 챙겨주고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한 달. 다음에 밝게 웃으며 봅시다. 선생님은 자신을 믿고 잘 보낼 수 있어요.>


요즘 사무실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그게 꼭 내 탓은 아니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모두의 책임일 텐데 분위기 전환이 잘 안 된다. 그럼에도 업무는 해야 했기에 각자 업무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단체관람이 있어서 박물관 홍보를 위해 오전 시간을 다 사용하고, 다른 선생님들은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이후, 산책을 나가보니 장관이 따로 없다.

갈대인지 억새인지 너무 아름답다.

내 마음이 힘들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내 마음을 인정하면, 남의 마음도 인정해야 할 텐데. 마음이 쉬고 싶은 건 현대인의 모두의 고민이 아닐까. 남편도 아마 쉬고 싶었을 텐데 때늦은 후회를 한다.


갈대인지 억새인지 모를 저 길이 너무 예뻐서 가짜 같았다.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시간이 아쉬웠다. 늘 붙잡고 싶은 시간은 빨리도 지나간다. 나만 고생한 게 아닌 하루. 모두가 각자의 짐을 지고 오늘도 수고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사무실 직원들도. 다들 정말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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