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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국 Feb 12. 2023

<피아니스트>: 욕망의 절정

빨리 감기로 봤는데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일단,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까마득한 시절부터 <피아니스트>를 알고 있었다. 내가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지. 관음증인지 모르겠는데, 야한 영화도 멋있어야 본다. 야한 영화가 멋있지 않으면 너무 싫다. 영화감독 중에 나와 같은 변태가 많을 것이라 확신한다. 영상이며, 스토리며 어느 하나 변태성향이 맞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닐까?


프랑스 변태 감독 프랑소와 오종을 좋아한다. 야한 영화를 보고 싶을 땐 그 사람 영화를 본다. 진짜 야하다. 그런데 야하기만 하지 않다. 인물의 심리를 정말 묘하게 영상에 담는데, 나는 그게 흡입력이 있게 느껴져서 주인공에게 빠져든다. 불편한 주제를 가지고 아주 신나게 영화로 까발린다. 나는 그런 게 좋았다. 내면의 심리 혹은 불편한 사회적 소재를 영화라는 매개체로 신나게 헤집어 놓으면 약간의 카타르시스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프랑소와 오종의 작품은 아니지만, 오늘 <피아니스트> 저 영화를 봤다. 청소년 관람불가니 당연히 야하거나 잔인하겠구나 했다. 봐야지. 봐야지 벼르던 영화였는데, 늘 못 봤다. 찾아보니 2002년 작이다. 대단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이 영화 한 편 보지 못하고 뭘 했지? 보고 났더니 굉장히 찝찝하다. 그런데 나는 그 여주인공이 너무 이해된다. 이게 문제다. 이해된다는 게. 심지어 여운까지 남는다. 이 영화가 <피아노 치는 여자>라는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누군가의 삶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작가의 소설이기 때문에 한 여성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에리카의 눈빛, 태도, 심리가 다 이해된다. 행동마저도 이해된다. 변태를 이해하는 또 다른 변태일 수 있겠지만. 미친년을 이해하는 또 다른 미친년일 수도.


나는 처음에는 에리카의 말이 너무 일반적이지 않아서, 낯설었다. 영화 속 에리카를 사랑하는 남자의 반응도 비슷했다. 낯설고 충격적인 표정이다. 그런데 에리카가 남자에게 매달릴 때, 그리고 그 남자가 에리카를 벗어나지 못하고 폭발적으로 반응할 때, 더 충격이었다. 한낱 사랑이라는 감정이 상대의 반응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본 것이다. 사랑이 집착이 되기도 하고. 광기가 되기도 하고. 거의 정상적이지 않는 에리카가 순수한 청년을 뒤흔들어놓았을 때, 나는 영화라면 끝까지 순수한 그 사랑의 마음으로 미친 에리카를 보듬어 안아줄 줄 알았다. 혹은 그러길 바랐는지도. 그런데 순수한 그 청년도 돌아버렸다. 돌지는 않더라도 현실적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청년의 말이다. 에리카를 구타하고, 성관계를 맺은 뒤.


청년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단지 미친 에리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맞대응할 뿐이었던 것 같다. 자해와 변태적 성향. 강박. 집착. 중독. 자기혐오. 뭐 없는 게 없는 에리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누군들 알 수 있으랴. 자전적 소설이었다는 것이 더 충격이다. 생각보다 유명한 여성작가이다. 그런데 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충격적이고 끔찍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에리카가 불쌍하다는 반응들이다. 에리카가 미친 사람이었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건 그녀를 둘러싼 배경(지나치게 엄격하고 집착하는 엄마, 사회적 입장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는 환경 등)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에리카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나는 영화가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이 아팠을 뿐이다. 미친 여자를 받아주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인가에 생각이 꽂혀서 조금은 낙담했다. 결혼한 유부녀여도 온전한 사랑에 목이 말랐었나 보다. 그냥 그 존재를 받아들이는. 그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그러니 사랑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은 존재를 변화시키는데, 미친 에리카를 만났으니 그 청년도 돌아버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너무 안타깝다. 마지막에는 에리카가 자해를 하고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해를 해도 세상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 사실이 더 슬펐다. 똑같은 일상. 나는 이걸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다른 맥락이지만 대학병원에서 병원비가 몇백만 원이 나오고 내 아빠는 죽게 생겼다는데도(너무 애정 어리게 표현했다) 세상은 똑같았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 너무 슬프고 아팠다. 에리카는 아마 그 평범한 일상이 지독하게 아팠을 것이다. 내가 죽고 싶은데 죽어지지는 않고 괴로운 데 살아야 하는 그토록 평범한 일상이 그녀의 족쇄일 것이다.


에리카를 보듬을 용기는 없다. 나도 미쳐버릴 테니까. 그런데 내 눈, 내 마음은 그녀에게 다 빼앗기긴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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