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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선아 Nov 17. 2023

나의 성장 대화론

둘째 주 연재



<에세이>


나의 성장 대화론




   기억력이 좋지 않다. 해야 할 일과 관련된 기억력은 아니다. 나의 계획과 상관있는, 미리 정해둔 시간, 활동, 참고해야 할 메모 같은 것들은 잘 기억한다. 했던 말, 들었던 말은 잘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게 내 정신에 두고두고 도움이 되는 말일 수록 더 그렇다. 안 좋은 말은 좀 덜 잊어버리긴 하지만 비슷하다. 사람의 말과 우리의 대화를 메모하는 습관은 나의 글쓰기 때문이 아니다. 나쁘던 좋던 기억하고 있어야 할 말들은 자기 전에 꼭 메모하려 든다. 하지만 메모는 종종 의도에서 벗어난다. 메모를 하다 보면 어느새 종이에다 대고 대답을 하고 있다. 현장학습 이후 느낀 점을 쓰는 것처럼 쓴다. 그때 바로바로 얘기하지 못한 말들, 듣고도 즉각 반론을 못 했던 말들이 뒤늦게 따라온다. 이렇게 기록을 해둔 사실도 쉽게 잊는다. 매년 한 권의 노트들이 모이고 있지만 다시 들춰지지 않는 이유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말 한 줄의 파급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다.


   말이 길어지는가 싶으면 숨이 찬다. 지금 나만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에 바짝 정신부터 차린다. 말에 실수가 없으려 애를 쓴다. 청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청자의 표정을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해석을 해버리면 내 말은 진심이었다가 소설이 된다. 오직 발언하고 있음에 집중한다. 문장 구조의 올바른 쓰임을 검사받는 학생처럼 긴장된다. 말이 점점 느려진다. 3초 전에 스스로 언급했던 논점과 지금의 주장이 일치하는지 점검한다. 말하면서 그걸 신경 쓴다. 말이 계속 느려진다. 말은 수습하지 못하기 때문에 빠른 것보다 느린 게 낫긴 하다. 나의 속도에 내가 답답함을 느껴 말을 하다가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은 적도 많다. 청자에게 다른 화제를 던진다.


   입을 통해 나와서 귀로 들어가는 말들 중에는 당연히 제일 인상 깊은 말이 뿌리내린다. 상대방의 정보를 포함하는 말, 예를 들어 출신과 나이와 이름 같은 것은 예외다. 순서가 어떻든 청자가 가장 필요로 한 정보가 마지막까지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감정이나 요구를 포함하는 형태의 말이라면 다르다. 네가 (중략) 그래서 슬프고 힘들었지만 우리가 (중략) 기뻤어. 결론은 기뻤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청자들은 ‘슬프고 힘들었지만’ 이라는 감정에 꽂힌다. 앞으로 청자의 무의식에서 두고두고 발현될 기억으로 남는다. 제대로 잘 말해도 듣는 사람에 의해 이야기는 변형되고 왜곡된다. 극복한 부정적 감정들을 통해 결국 이렇게 행복해졌다. 를 말하고 싶었어도 효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생각이 예민한 사람과 대화한다면 더더욱 자신의 의도와 멀어질 수 있는 게 ‘말’이다.


   나는 아무 영양가 없는 대화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여기서 영양가 없음이란 기록할 필요도, 곱씹을 필요도 없는 휘발성 대화를 뜻한다. 하지만 이제 쓸데 없는 대화가 좋아졌다. 술자리의 젊고 대책없는 대화, 길을 걸으며 땅콩 까듯 하는 대화 같은 것이다. 나의 정신적 개입이나 정성스러운 의견이 일말의 동화도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이랑 함께 한다면 더더욱 무거운 화제는 피한다. 자칫하다 서로의 가치관, 지향하는 것을 공유해야 하는 대화가 시작되면 내 말이 자꾸 길어진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말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커져서 참기 어렵다. 동시에 나를 자주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사유를 인정하기까지 그 과정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이런 대화가 잦아져선 안된다.


   듣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의 눈을 곧잘 쳐다본다. 더 나아가 표정도 본다. 더 나아가면 몸짓까지 볼 수 있다. 말을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을 넘어 분석하려 드는 태도가 다소 건방져 보이기도 하다. 예의에 있어서 결코 좋지 않다. 하지만 분명 장점이 있다. 방금 이 말을 시작했던 게 나의 질문 때문이었나, 오직 자신의 의지였나부터 고민해 본다. 이 고민 하나로도 어떤 의도를 갖고 있을지 눈치채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의도를 알 수 있다면 대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가끔 대화 종결의 이유가 되는 ‘말 안 통함’은 각자의 의도, 즉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걸 발화라고만 취급하지 못하는 성격이 됐다. 처음에는 나의 기억력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냥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단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경박보다 과묵이 낫다. 물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려주지 않는 연습을 한다. 정보 노출은 착각의 소지를 만든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게 아니다.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잘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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