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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 Kim Jul 11. 2017

사랑에 빠지는 아주 짧고 예상치 못한 순간들

이 순간은 우리의 끝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처음일지도

본격적으로 우울한 날이 시작됐다. 종일 비가 내리고 뭘 해도 언짢아지며 누워서 책만 읽고 싶은 그런 날. 마음이 여간 싱숭생숭한 게 아니다. 이유를 몰라서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마냥 울어버리고 싶었다, 종종. 


물론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 울겠다는 것은 아니다. 운다고 누가 달래서 평온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우울함을 물리치고 잘 살아보겠다고 서점에 갔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사람이 많았다. 걸을 때마다 물이 떨어지는 슬리퍼를 끌고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옆자리에는 바닥에 가방만 떨어져있을 뿐,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원래 내가 앉고 싶던 자리였는데. 내 자리에는 콘센트가 없어서 조금 고민하다가 옆 자리 콘센트에 충전기를 끼웠다. 이 콘센트가 나중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도 못한 채. 




노트북으로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빈자리의 주인이 앉았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피부는 막 좋은 것 같지는 않은 평범한 남자. 머리는 약간 곱슬이고, 체형은 건장했다. 핸드폰을 보면서 웃는 게, 친구들과 재밌는 대화를 나누는 중인 것 같았다. 분명 애인은 아닐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갖고 온 책을 읽는데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심하게 울렸다. 누군가 핸드폰을 안 받나, 빨리 좀 받지. 그런데 옆의 남자가 앞사람의 진동벨을 들더니 보여주었다. 그러자 앞사람이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뭐라고 괜히 옆자리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사람 참 괜찮네. 이때부터 나는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쉽게 말을 걸 수는 없고, 의식하기 시작하자 내 표정만 점점 굳어갔다. 옆자리 남자가 신경 쓰였다(왜?). 그 사이 남자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책은 펼쳐놨지만 온 신경은 옆자리에 향했던 나는 가만히 팔을 뻗어서 내 충전기를 잡았다. 그러자 옆에서 남자가 말했다.


“그냥 하셔도 괜찮아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좀 반한 것 같다. 아니 반한 게 확실하다. 동그란 안경 사이로 보이는 순한 눈, 전체적으로 착해 보이는 둥근 인상. 조명 탓인지 얼굴이 더욱 환해 보였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다정했다. 이 남자는 부드러운 사람일 거야, 친구들과 사이가 좋고 다른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세심한 사람일 거야. 


이것 참, 누군가에게 반하는 순간은 이처럼 짧고, 아주 극단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는 순간은 단 0.6초라면 충분하다니까. 무엇보다 그 순간의 느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니까. 아마 내가 오늘 카페에 가고, 비어있는 것 같은 자리 옆에 앉고, 콘센트를 꽂은 이유가 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아니었을까?     


다만 나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아, 지금 안 써도 돼요.’하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모르겠다. 좀 웃을 걸, 어휴. 그리고 나는 그의 왼쪽에 앉았는데, 나는 왼쪽 옆모습이 더 괜찮은데. 아쉬웠다. 어쩌다 한 번, 눈이 마주쳤다가 어색하게 (또는 화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너무 긴장했기에 그 무엇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이럴 땐 뭐라고 말하지? 저랑 친구 하실래요? 여기 자주 오세요? 그가 자리를 비우면 냅킨에 뭔가를 적어서 자리에 올려놓고 떠나야 하는 것인가? 마음은 요동치는데 결국 실행하지 못한 채 타임아웃. 그가 자리를 정리했다. 바닥에 놓았던 가방의 지퍼를 열고, 노트북을 넣고 다시 지퍼를 잠그는 수리. 휴지와 컵을 치우고, 가방을 메는 소리. 비닐에 쌓인 우산을 잡고, 의자 끌리는 소리.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을 때, 몸을 돌렸다.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눴던 그 짧은 순간,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을까? 옆 자리 여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생각보다 일찍 간 것은 아닐까? 사실은 그게 아닌데, 나는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비언어적인 후회감이 몰아닥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들었다. 어쩌면 내일, 어쩌면 이번 주, 다시 마주칠지도 몰라. 어쩌면 동네 카페에서, 아니면 또 이 카페에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완전한 끝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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