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책 배우자 이야기
첫 시작은 주식이었다.
지금처럼 한집 걸러 국민의 절반 이상이 주식과 코인을 마트에서 장 보듯 사고팔던 시기도 아니었고,
당시만 해도 집안에 주식하는 사람이 있다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려야 하는 투기의 느낌이 강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단칼에 잘랐었다.
하지 말라는 짓은 안 하는 원칙 주의자인 내 기준에선 당연히 안 하기로 했으니 그 이야기는 그걸로 일단락된 줄 알았지... 그 주식 사건이 일단락이 아닌 일단 사고의 시작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신혼 여행지에서 나 몰래 한국에서 로밍까지 해와 어딘가와 긴급한 통화를 해댔고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하지못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결혼할 때 들어간 돈을 갚아야 한다며 카드값 핑계로 생활비를 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에 난 또 그렇게 넘어갔다.
사건이 터진 건 결혼 후 두세 달이 지난 시점.
돌려 막기가 불가해진 그는 빚이 조금 있는데 갚아줄 수 있겠냐며 숨겨두었던 비밀을 꺼내놓았고 내용인즉슨 결혼 전에 잠깐 이야기 나왔었던 그 주식으로 인해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제길, 이때 그만뒀어야 하는 건데...
미련함인지 책임감인지 남편의 힘듦은 아내가 같이 짊어지고 가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선 나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와 그렇게 빚을 갚아줬다. 그렇게 하면 그 일은 없던 것이 되고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당연히 있었겠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기도 하고 실제 사건 사고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어떤 일이 먼저인지 순서가 정리되진 않지만 아무튼 주식은 그냥 애교 수준이었다.
이후로 발생한 일들은 그냥 죄다 불법적인 것들 뿐이었으니깐.
그때 난 처음으로 스포츠 토토라는 단어를 들었다. 십 년도 더 된 이야기...
놀라운 것은 단순히 도박에 배팅을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란 사실이다. 도박 사이트에 몇천만 원을 투자를 한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돈을 넣었다 뺐다 하고 그러다 재수 없으면 돈이 묶이는(?) 그렇게 날리는(?) 상황도 발생하는,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나 들어볼 법한 저 세상 이야기를 신랄하게 듣고 보며 정말 기가 차다 못해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그로 인해 당연히 빚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범죄와 거짓이 파생되는 것은 당연지사.
평범한 월급쟁이였던 그는 거래처를 이용하여 리베이트식의 횡령을 일삼았고 일찌감치 카드론, 현금서비스, 사채까지 막혀버려 지인들에 돈을 꾸며 연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업계에서 만나 결혼까지 한 사이였기에 우리 둘 모두를 잘 아는 업계 선배가 나에게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말투로 묻기를,
'듣기론 장인어른이 사업을 하다 잘 안돼서 큰 빚을 져 그것을 막아주려고 걔가 지금 그러고 다닌다는데,
그게 정말 맞아...?'
이 문맥에서 장인어른이 누구지...? 우리 아빠...? 근 10년 가까이를 연락두절로 어디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그 사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장인어른을 파는 것은... 너무 선 넘었네
업계에서 떠도는 나만 몰랐던 나와 그의 이야기.
거짓된 상황과 우리 부부가 파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한 다리 건너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나의 대인 기피증은 시작되었다.
마음 같아선 모든 걸 그만두고 업계를 떠나 잠수를 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무 일 없는 척하고 회사를 다니고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와 가슴의 통증, 두근거림, 운전 중 차 사고를 내고 싶은 충동 등 딱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겪어내며 그렇게 이혼을 준비했다.
신혼집 전세 기한이 만료되는 시점에 별거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단 극적인 타협을 이끌어내고 이사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또 하나의 소름 끼치는 사실은,
이미 이 집은 나도 모르게 반전세로 바뀌어져 있었고 보증금 일부는 그가 벌써 어디론가 빼돌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뭐 크게 놀랍지도 않고 그저,
'너도 참 어지간하다' 정도의 느낌만이 든다.
그렇게 나는 친정집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는 회사 근처 어딘가에 원룸을 구해 나갔다. 2년 간의 결혼 생활 중 그의 빚을 갚아주느라 내 이름으로 진 은행 빚이 몇 천만 원 남아있었지만 측은지심인지 뭔지 그의 원룸 보증금 500만 원은 대주었다. 당연히 얼마 안 가 그것도 증발해 버렸지만.
일일이 나열하자면 더 있겠지만 그의 돈 잔치로 인해 겪었던 일들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건,
그의 회사 선배 와이프란 사람으로부터 돈을 대신 갚으라고 전화받았던 일과 별거 후 친정집에서 출퇴근하는 나를 어떻게 알고 매일 같이 찾아와 예의 주시하던데 그 아저씨.
어렸을 적 집에 빚쟁이들이 하도 많이 찾아와 슬프게도 본능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구분할 줄 알았는데, 그는 바로 떼인 돈을 받으러 온 사람이었다.
한 몇 개월을 그렇게 집 앞으로 찾아와 몇 시간씩 죽치고 있더니 당시 내 남편이 나의 친정집에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란 인간 때문에 빚쟁이들에 시달리더니, 결혼을 해서는 남편이란 작자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네.
참 애비복 없는 여자는 남편복도 없다더니... 딱 나 구먼
친정집에 들어가 엄마가 해주시는 따스운 밥을 먹으며 조금씩 치유를 해나갔다. 물론 이혼 도장을 찍고 법원에 그를 데려가야 한다는 크나큰 미션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당장 숨은 쉬어지는 기분이어서 그래도 조금은 나았다.
끝까지 회사 생활은 포기하지 않았기에 빚은 조금씩 갚아나갔고 어느 날엔가는 문득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어 입문자용 바이올린을 사고 일대일 레슨도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말씀하시길,
그래,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편하게 살아라.
네, 그럴게요. 이제 아버지나 남편의 그늘 따위 찾지도 기대하지도 않을게요. 내 팔자에는 그런 거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니깐...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까지 30년 걸렸네요.
이제 더 이상의 변수는 감내하고 싶지도 그리 할 힘도 없으니 이제 엄마랑 나랑 둘이 의지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