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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작가 이윤정 May 27. 2024

매달 시간을 내기로 했습니다.

거인의 생각법 27 - 방향을 잃지 않기

‘몇 번 출입구?’하고 카톡이 왔어요. ‘2-1’이라고 보냅니다. 종로3가역에서 만나기로 했죠. 1호선을 타고 벌써 도착했다고 합니다. 을지로 3가 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서 한 정거장 가면 종로3가역이라고 한 정거장 남았다고 전화했어요. 3호선에서 내려서 1호선 출구 근처로 가려니 300미터는 족히 되어 보입니다. 개찰구를 나가자마자 달렸어요. 계단을 뛰어 올라갑니다. 계단 위에 회색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바지에 점퍼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눈이 마주쳤어요. 양팔을 흔들며 뛰어 올라갑니다. 아빠입니다. 오늘은 아빠와 처음 데이트하는 날이었어요.     


지난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 아빠. 언니 집 근처로 집을 구했죠. 언니 집과는 도보로 3분 거리예요. 제 경우는 시간을 따로 내지 않으면 한 달에 한 번 아빠 보기가 어려웠어요. 뭐가 그리 바쁜지. 아빠가 우리 집 근처 병원에 가시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서울에 올라오셨어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어요.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언니랑 광릉 수목원에 다녀오셨데요. 하루는 아빠 혼자 경춘선을 차고 춘천역까지 다녀온다고 사진을 공유하셨고요. 과천 선바위역 근처에 칼국수가 있다고 혼자 가셨는데, 두 명 이상만 주문할 수 있다고 식사를 못 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 싶었습니다. 나만 행복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가족에게 시간을 따로 못 내고 있다는 걸. 일주일 중 월요일은 무조건 비워둡니다. 남편과 재활용 쓰레기도 함께 버릴 겸 드라이브 가서 외식하고, 커피숍에 가거나 낯선 지역에 가서 산책을 종종 하고 오거든요. 때론 남한산성에 올라가기도 하고, 남산, 아차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북한산 스타벅스, 남한강 스타벅스, 코엑스몰, 양재천, 선릉, 인헌릉 등 집 앞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바람 쐬러 다녀요. 행복은 아끼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남편과 계속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빠에게 갈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려웠어요. 남편과 아빠가 함께 다니면 좋겠는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고민한 결과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은 남편 대신 아빠와 데이트하기로 남편에게 협조를 구했어요. 남편에게도 자유시간을 주는 셈이죠! 좋다고 했습니다.     


오늘이 그 첫날이었죠! 계획은 인천 신포시장이나 차이나타운에 가려고 했다가 며칠 전 통화하니 혼자 다녀오셨다고 하셔서, 서울 시내로 변경했어요. 주민센터에서 서예를 배우고 계셔서 ‘인사동’ 필방을 구경시켜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처 익선동도 안 가보셨으니 겸사겸사 가면 괜찮겠다 싶었죠.     


오늘은 남편 대신 아빠 손을 잡고 종로3가역 2-1번 출구에서 3호선 출구를 지나 5호선 출구까지 걸었습니다. 종로 3가 근처가 50년 전에는 집창촌이었다며 이야기해 주시네요. 처음 알았어요. 익선동 입구에 도착해서 골목 안을 걸어 다니며 구경했어요. 월요일 아침이지만 외국인들이 많네요. 한 바퀴 돌아보니, 이런 동네에 뭘 보러 오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오랫동안 안동에서 사셨으니, 더 좋은 한옥을 수없이 많이 봐온 터라. 식빵 가게인지 토스트 가게인지 외국인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은 신기해하겠다며 웃으시네요. 열한 시쯤 만났어요. 아직 식당은 오픈 대기 중인 상태. 제가 점심 잘 먹으려고 아침을 굶고 갔거든요. 배가 고팠고, 아빠는 오늘 7시에 일어나셨다며 아직 배가 안 고프다고. 소금빵이라도 먹고 허기를 채워야겠다 싶었죠. 옆 공간에 좌석이 있길래 보니, 빵 가게 손님용이 아니라 반대편 카페 손님용이었어요. 식사 전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메리카노가 대접만 크기의 찻잔에 나옵니다. 아빠는 신기해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십니다. 소금빵도 옆에 올려놓으라고 하시네요. 먹던 빵 반 조각 대신 새 빵 하나를 꺼내 커피잔 옆에 놓았어요. 저까지 스마트폰을 꺼내 각자 사진을 찍었습니다. 커피잔 크기를 보면서 아빠가 껄껄 웃으시길래 동영상에 담았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가기 전에 익선동 근처 식당을 몇 군데 찾아봤어요. 분명 어떤 것 드실 거냐고 여쭤보면 내가 좋아하는 걸로 고르라고 하실 터였죠. 아빠 입맛에 맞는 식당을 몇 개 골라봤어요. 호텔 주방장 출신의 오너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 하나를 골라 두었습니다. 육회 비빔밥과 크림 스파게티, 샐러드, 오렌지 주스가 나오는 런치 세트가 있더라고요. ‘아카’(일명 아빠카드)로 결제합니다. 아빠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셨지만, 육회 비빔밥도, 크림 스파게티도 둘 다 남기고 나왔어요. 한국 사람만 오는 식당인 듯 보인다며.     


밖으로 나가 낙원상가를 거쳐 인사동 거리를 향해 걸었어요. 아침에 본 지도에서 3.1 독립운동 기념터가 있더라고요.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의미가 있을 듯해서 아빠에게 말씀드렸죠. 승동교회 앞에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인사동 거리로 나왔어요. 붓을 파는 필방이 많았습니다. 두 곳 정도 들려 붓과 교재를 구경했고요. 인사동 거리 끝까지 올가 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옛 찻집에 들렀죠. 쌍화차 한잔과 옛날 팥빙수를 주문하고 2층 창가에 앉았습니다. 복지관과 주민센터에서 서예반 차이점, 유튜브에서 초서, 행서를 찾아보고 있다며 한참 동안 아빠의 서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 달엔 어디로 갈까 여쭤봅니다. 어디 갈까, 하더니, 강화도 위쪽에 섬이 어디냐고 물으시네요. 지도를 펴서 확대해 봤어요. 석모도인가? 여긴 작년에 언니들과 함께 다녀온 곳이라고 했어요. 다시 확인해 보니 아빠가 가보고 싶은 곳은 ‘백령도’였습니다. 하루 만에 다녀오긴 힘든 곳이죠. 지도를 펴서 울릉도, 독도도 가보는 건 어떠냐고 말씀드렸어요. 다음엔 대만 여행도 한 번 같이 가시겠냐고 여쭤보니 뭐가 있냐고 물으십니다. 절대 해외여행 안 가시겠다고 하셨었는데, 이제 살짝 마음이 열리신 듯 보이네요. 카페에서 거의 두 시간 이상 보냈네요.     


이제 집에 가자고 하시길래, 지하철을 타려고 종로 3가 쪽으로 걸었습니다. 지나는 길에 탑골 공원이 보였어요. TV에서 많이 보던 곳이라 한 번 들려보기로 했죠. 우연히 ‘원각사지 10층 석탑’ 국보 2호가 있더군요!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야 했어요. 대단한 목표를 이루고 나서야 부모님에게 잘해드려야지 했다가는 더 이상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퇴사 후 친정 한 달 살기는 저에게 신의 한 수였죠. 먼저 하늘로 올라간 엄마와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거든요. 또 놓칠뻔했어요. 매달 아빠에게 시간을 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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