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작가 이윤정 Nov 20. 2024

아빠, 엄마가 전하고 싶은 말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2779회차

241120 부모 심정 이해하기

오늘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시작과 달리 놀랍도록 변한 나 자신을, 내가 어느덧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말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김도윤 작가의 아버지는 택시기사였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취업할 곳이 없어서 택시 일을 시작했다고 해요. 김도윤 작가가 어렸을 때는 아빠의 직업란에 '택시 기사'를 적는 게 너무 창피했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아들의 그런 마음에 상처가 쌓였겠지요. 그런데 10년쯤 일하다 보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업을 인정하면서 택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승객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 경치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업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치를 만끽하며, 
내게 이런 풍경을 선물해 준 택시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7년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리고 느꼈다. 
시작과 달리 놀랍도록 변한 나 자신을, 
내가 어느덧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음을 말이다.
승객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이번엔 주변 경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 아버지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제 주변에도 택시 기사님이 있습니다. 대학 친구 아빠도 택시기사였어요. 학교 다닐 당시에는 회사에 소속된 택시를 몰다가 어느 순간 개인택시로 바꾸셨죠. 전 아빠가 택시 기사인 게 좀 부러웠던 날이 있었는데요. 친구가 분당이나 삼성역 인근에서 일할 때 야근할 때면 회사에서 택시비를 지원해 줬데요. 그럴 때마다 아빠에게 연락해서 아빠가 딸을 태워 집에 데려다주는 게 좀 부러웠습니다. 


언니네 시아버지도 택시기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든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택시 운전을 하고 계세요.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언제든지 나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일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축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연세에 운전을 못한다고 하시는 데 여전히 쌩쌩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그런 시아버지를 봐서인지 형부도 택시 운전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기업에 취업했다가 적성이 맞지 않아 퇴사를 했죠. 언니랑 결혼한 상태였는데 퇴사를 하니 엄마 아빠도 얼마나 속상해하셨을까요. 그래도 언니와 조카 먹여 살리려고 사촌 형이 건축업 하는 곳에 가서 일을 도와주다가 2층인가 3층에서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대퇴부와 허벅지가 찢겨 대수술을 하고 철심을 박았습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집에 그냥 계셨는데요. 그냥 있을 성격이 아니었어요. 방통대에 법학대에 입학해서 졸업을 하고,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서초에 있는 부동산에 취업을 한 적도 있었죠. 그 일도 쉽지 않았는지 몇 달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기사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개인택시를 하려면 회사 택시 경력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형부는 거의 3년 정도 2교대를 하면서 택시를 밤낮으로 몰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개인택시를 하게 되었고, 언니랑 알콩달콩 잘 지내고 살았습니다.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려야 했으니 부담이 있었겠죠? 택시 기사를 할 때 형부도 늘 즐거워했습니다. 업을 사랑하게 되었었죠. 항상 농담을 건네는 형부였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다가 심근 경색이 와서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뒤, 형부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형의 우울증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삶이 가능했던 나와 달리, 엄마는 이미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형의 사고가 미동도 주지 못할 정도로, 엄마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김도윤 작가의 형은 수능성적 상위 5%에 들어서 국립대에 들어갈 정도로 똑똑했지만, 1학년  시절 재적을 당하고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해서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경쟁 상대였고 우러러보는 형이었는데,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다고 해요. 형의 병은 우울증에서 시작해 공황장애, 조현병까지 겹치고, 망상, 환청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형을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시켰다고 하네요. 형의 우울증이 엄마에게까지 전염되었다고 합니다. 믿었던 아들로 인해 엄마에겐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형의 우울증으로 가족들이 상처를 받았지만 김작가는 삶이 가능했고, 엄마는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기 힘들었고, 결국 형이 입원했던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이제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이 글을 읽다 보니 등골과 양쪽 팔의 근육이 죄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뒷목 근육도 욱신 거리네요. 


이런 느낌이 든 이유는 저도 엄마 생각이 나서입니다. 엄마에게도 조울증이 있었거든요. 아빠에게 여쭤봤더니 아마 큰 언니를 나은 후부터 산후 우울증이 왔다고 해요. 우리 할머니에게 시집살이를 했나 봅니다. '아들'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엄마도 자살 시도를 몇 번한 적 있어서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어요. 어릴 때 엄마가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병원에 있었었다고 하더라고요. 학창 시절에는 아빠를 고생시키는 엄마가 정말 미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매일 약을 챙겨 먹고, 환절기마다 잠을 못 주무셔서 아빠도 날 밤을 새우셨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하고 싶다고 직접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빠와 저는 말릴 수 없었죠. 아무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어요.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는 고구마 삶은 것, 홍시를 사다가 병원에 올려 보내곤 하셨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제게 전화하는 엄마가 어떻게 참았을까요? 엄마는 공중전화로 제게 전화를 가끔 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궁금해서 병원으로 전화해 바꿔달라고 할 정도였는데요. 다행히 2주 정도 지나서 엄마가 더 건강해져서 나왔습니다. 그동안 먹던 약들을 다 끊었더니 오히려 정신이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쌩쌩한 엄마를 마주하게 된 거죠. 그때부터 엄마가 편지도 다시 쓰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제 책도 끝까지 읽어줄 수 있었습니다. 엄마에게 손 편지도 그때 몇 번 받은 기억이 납니다.

 몇 개월 그 상태로 지나다가 갑자기 정신이 희미해지시더니 팔다리에 힘이 쓱 빠지면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어요.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50년 동안 아픈 엄마를 캐어하던 아빠는 엄마의 부재에 공허함을 느꼈고 우울해지는 것 같아서, 서울로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의 아빠는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서 가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다 하고 지내고 계십니다.  늘 괜찮을 줄 알았던 가족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랑이 너무 그립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입니다.


"겸손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엄마 미안해. 엄마도 이번 삶이 처음인 걸 몰랐어. 엄마는 내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어른이었으니까, 늘 괜찮은 줄 알았어.

-늘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Write, Share, Enjoy, and Repeat!

평단지기 독서 2024년 - 23차 - 5《내가 천 개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김도윤, 2779회 차 


http://litt.ly/ywritingcoac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