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휴양지에서는 모쪼록 쉬어야하는 법. 조식을 맛있게 먹고 에어컨 잘 나오는 숙소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수영장이 보이는 공용공간이 있어 거기에 앉아 책을 읽었다. 세계여행을 대비해 전자책을 가져왔는데 사실 몇 번 읽지도 못했다. 천천히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다. 50번 헌혈이 목표인 내게도 피 뽑는 허삼관 심정이 전해진다.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커다란 파초가 바람에 살랑 흔들리고 매미가 울고 눈 마주친 도마뱀이 호다닥 도망간다. 푸꾸옥을 생각하면 허삼관 매혈기가 생각날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궁금하다.
오토바이 렌트가 아니면 어딜 가기에도 애매한 위치, 택시를 타고 다녀야하나 고민했는데 푸꾸옥에는 무료 버스가 있다. 베트남 대기업 ‘빈그룹’에서 북부에 빈원더스라는 거대한 단지를 조성해놓았는데 놀이공원, 워터파크, 사파리까지 있다. 바로 빈원더스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10분 간격으로 운영하는 것. 푸꾸옥은 주요 도로가 하나라 우리 리조트 앞에서도 탈 수 있다. 오늘은 무료 버스를 타고 빈원더스의 그랜드월드에 간다. 그랜드월드는 베네치아를 본떠 만들었다는데 인공 수로와 호수를 중심으로 유럽풍 건물이 길게 이어져있다. 건물에는 호텔과 식당들이 입점해있는데 워낙 규모가 커 아직 공실이 많은 것 같았다. 중앙 호수에서는 밤에 레이저 분수쇼를 한다. 아내와 나는 정처 없이 걸으며 사진을 찍고, 이어진 길을 따라 해변에 다다랐다. 이미 해가 져 캄캄한 밤바다였는데 어제 봤던 항구와 달리 쓰레기도 없고 깨끗하다. 더구나 모래가 몹시 고와 맨발에 닿는 느낌이 보드랍고 좋다. 먼바다 끝에는 오징어 배가 반짝이고 거기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한낮의 뜨거움은 바닷물에 남아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다. 지도를 보니 바다 건너에는 태국이 있고, 지금 보이는 지형이 타이만이라고 한다. 새로운 땅을 처음 밟는 느낌은 언제나 신선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하루를 보내는 일상은 무료해지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으며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건 새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행은 늘 새로운 하루를 선물해주고, 농밀한 시간을 보내게 한다. 총총 별을 보며 따뜻한 밤바다에 발을 담그고 행복해하는 아내를 바라본다.
중앙 호수에서 펼쳐진 쇼도 볼만했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엄청난 물줄기를 쏘아올리고 그게 호수 주변 관광객들에게로 떨어지는데 현명한 사람들은 우산과 우비까지 챙겨왔다. 모두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이어 성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데 나는 이 와중에도 매일 이런 쇼를 한다면 그게 얼마야, 계산기를 돌려본다.
북부에 빈원더스가 있다면 남부에는 썬월드가 있다. 베트남의 대표 라이벌 그룹인듯하다. 선월드에는 선셋타운이라는 역시 유럽풍으로 조성된 마을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카, 그리고 섬 전체를 워터파크와 놀이공원으로 조성한 혼똔섬이 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워터파크에 간다.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바다를 건너는 8km 케이블카를 타고 혼똔섬에 들어섰다. 정비중이어서 이용할 수 없는 놀이기구도 많았지만 하루를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워터파크라는 곳에 처음 와봤는데도 잘 놀았다. 여러 모양의 워터슬라이드를 타며 속도와 스릴을 즐겼다. 규모에 비해 사람이 별로 없어 줄을 안 서도 된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동그란 통 안에 들어가 바닥이 꺼지며 수직 낙하하는 기구도 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기구를 탈까말까 고민만 하다 결국 못 탔다. 아직도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다. 어쩜 나이가 들며 용기를 더 잃어가는지도.
푸꾸옥에서 거의 매일 한 일은 바다 노을을 보는 것이었다. 6시 즈음이 되면 광활한 공연장이 하늘에 마련된다. 매일 프로그램이 다른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잠깐씩 보였다가 이내 섞인다. 그 가운데는 노른자처럼 빛나는 태양이 있는데 그 빛은 물결을 따라 반짝이며 해변에 닿는다. 해는 겁도 없이 빠르게 바다로 내려가 이내 노른자가 터져 풍덩 빠져버린다. 해가 지고서도 하늘은 공연을 한참 더 보여주고 곧 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숙소에서는 브레이크를 잡고서도 20미터는 더 나가는 고물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걸 타고 골목길을 지나 바다로 갔다. 하늘과 바다의 장엄한 오케스트라에 매일 황홀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색마저 석양에 빼앗겨버리고 곧 실루엣이 된다. 여행이 금세 추억으로 짙어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