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계엄’, 아니 ‘내란’ 사태를 지나오며
지난해 12월 3일 그 차가웠던 겨울밤 이래로
끊임없이 반성합니다.
생존과 정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온 지난날을
나 하나 먹고살기 바쁘다며 방관해 온 수많은 악을
세월호에서 허둥대던 아이들의 몸부림에도
이태원에서 짓밟힌 청년들의 꿈속에도
비행기에서 불타오른 여행객들의 추억에도
화마에 스러져 간 수많은 생명의 아우성에도
하릴없이 하늘만을 탓하며 그들의 불운을 애도할 따름이었습니다.
총부리의 서늘함이 우리의 목전에 덮쳐온 그 순간에야 알았습니다.
그들의 죽음 뒤에는 아득한 부정의가 있다는 것을
그 지독한 악의가 언젠가 나의 생명과 자유조차 앗아갈 수 있음을
그 모든 사건은 단순한 천재가 아닌 인재이기도 함을
악의 평범성과 일상성, 그리고 그 위에 선 우리의 무기력함을
3월 1일도, 4월 3일도, 4월 16일도, 4월 19일도,
5월 18일도, 6월 6일도, 6월 10일도, 6월 25일도,
8월 15일도, 12월 12일도 아닌...
12월 3일에야 알았습니다.
그 지성적 게으름의 원천은 미천한 이기심이요,
이 윤리적 각성의 원천은 보잘것 없는 한 생명의 생물학적 본능이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22시 28분부터 오늘 4월 4일 11시 22분까지,
121일하고도 12시간 54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크게 부르짖었고, 낮게 반성했고, 깊이 성찰했고,
결국 목도 했습니다.
그 허무한 죽음들이 만들어 낸 가장 값진 결과물을
무의미 속에서 비로소 피어난 의미를
부정의를 이긴 정의를
몰상식을 몰아낸 상식을
혐오를 끌어안은 사랑을
권력을 이긴 국민을
이 모든 일을 함께 이루어 낸 우리를
결국 우리의 역사 속에서 떠난 이들을 기리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은
그들의 죽음 위에 선 우리가 오늘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임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명의 권력자가 이제 그 힘을 잃었습니다.
아직은 그저 그뿐입니다.
그 공백을 누군가는 걱정할 것이고, 누군가는 흐뭇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어야 합니다.
그 여백에 또다시 악랄한 낙서를 남길 것인지
혹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나갈 것인지는
우리, 즉 미래를 그려나갈 청년이라는 이름의 화가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제 다시 나아갑시다.
그 모든 영령에게 떳떳할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더 멋진 미래를 위해.
더이상 부끄럽지 않을 우리의 청춘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