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말, 증조할머니의 품
흐릿한 기억 속의 고향 마을
흐릿한 기억의 숲을 걷는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작은 숲길.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나뭇잎에 맺힌 촉촉한 이슬 사이로 아침 햇살이 수줍게 인사를 한다.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와
산뜻한 봄꽃 내음 가득한 숲 길을 계속 걷는다.
저 멀리 숲 길의 끝이 보이고
그 뒤로 작은 호수 하나가 다가온다.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호수.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다.
그 옆에는 작은 기찻길이 보인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작은 꼬마 기차가 그 길을 지나간다.
내 기억 속의 고향은 한 장의 그림 같았다.
내가 태어난 마을 이름은 역말(驛村, 역촌)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말(馬)을 바꿔 타던 곳을
옛 사람들은 역말이라고 불렀다.
내 고향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역 중의 하나인 신은역 자리였다.
지금의 천안 북일고와 단국대학교 중간쯤에
위치한 오래된 마을로, 아직도 어르신들은
이곳을 역말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쪽에는 소나무와 밤나무로
가득한 조그마한 산이 있었고
그 앞에는 넓게 펼쳐진 저수지와
맑은 시냇물이 흘러내렸다.
지금은 단대호수 또는 천호지라고
불리는 천안을 대표하는 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천안과 안성을 잇는 안성선이라는
기찻길도 있었다.
이런 특별한 기억 때문인지 가끔씩 잠이 들 때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고향 마을을 찾는다.
내 삶은 '역말'에서 시작되었다.
1977년. 우리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증조할머니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6형제 중 셋째부터 여섯째까지
모두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두 분의 큰아버지들이 외지에 분가하여 살았기에
셋째인 우리 아버지가 집안의 궂은 살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경제적으로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었지만 대부분 저수지 근처의 나라 땅을 빌려서 하는 소작이었고
작은 아버지들은 직업이 없거나
군대에 있었기에 수입원이 전혀 없었다.
수입이라고는 농사를 지어서 수확한 쌀 몇 가마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양계장과 도자기 공장을 다니면서 벌어온 월급 몇 만원.
그리고 방 2개를 대학생에게 하숙 주면서
받는 돈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농사까지 지었기에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아흔 가까이 되신 증조할머니가 돌봐주셨다.
어린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신 증조할머니는 제주 고씨로 저 멀리 제주에서
충청도 천안으로 시집을 왔다고 한다.
20살이 되던 1909년에 결혼을 해서 1910년에 장남인 우리 할아버지를 낳으셨다. 네 명의 아들을 나으셨지만 그 중 하나는 전쟁에 군인으로 나갔고
끝내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고예정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증조할머니는 구한말 태어나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등
한국의 모든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삶을 살아오신 그 당시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증조할머니에게 나는 소중한 보물같은 존재였다.
환히 웃으며 아장아장 걷는 증손자 귀여움을 즐기셨던 나의 증조할머니.
그 품에 안기던 기억은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시작된 나의 삶의 시작.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걷던 아름다운 호수와
꼬마 기차가 어디론가 향하던 끝없던 기찻길.
아장아장 첫발을 내딛고 뛰어놀던 드넓은 마당.
내 삶의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 몇 개.
그렇게 나란 존재가 세상에 첫 발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