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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중간고사와 영세민 소동

만만치 않았던 중학교 1학년

by Wynn

"걸리면 죽는다!"

반편성 고사를 마치고 처음으로 중학교에 등교하는 날. 학교 정문에서 마주친 무시무시한 포스(?)를 지닌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공포의 학주(학생주임)였다. 까무잡잡하고 주름살 가득한 얼굴. 뭔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우리 신입생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단단하고 긴 회초리를 들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매서운 눈초리의 선도부 선배들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머리가 길거나 단정하지 않은 사람, 명찰을 하지 않은 학생, 지각생들이 그의 재물(?)들이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경험한 중학교의 첫인상이었다.


중학생 신입생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첫 중간고사였다. 초등학교 시절 경험해보지 못했던 수준 높은 시험이었다. 특히 학교 수업만으로 당연히 풀 수 있다고 자신했던 과목들, 도덕과 한문, 과학 과목은 거의 반타작 수준으로 대충격이었다. 외울 것이 많았지만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서 많은 문제를 틀릴 수밖에 없었다. 음악 실기시험도 변성기의 영향으로 고음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내 평생 영원히 남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대참사(?)로 인해서 성적표는 감히 부모님께 보내드릴 수 없을 정도였다. 머리만 믿고 있었던 나에게 처음으로 실패의 경험을 선물에 준 특별한(?) 시험이었다. 시험 결과로 인해 나는 담임선생님께 큰 꾸지람을 들었다. 반편성고사 성적에서 너무나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라', '노력을 더해라'라는 뼈아픈 충고가 한 학기 내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호출에 깜짝 놀라서 교무실로 달려갔다. 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주면서 가정환경을 내일까지 적어오라고 했다. 얼핏 선생님 책상 위를 살피니 가정기록부에 적혀있는 나의 아버지 직업과 학력란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부(父): '철근공'. 선생님은 내게 가급적 힘들고 어려운 점을 강조하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이유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집에 돌아와서 선생님이 시킨대로 A4용지 한 장을 모두 채웠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아버지는 평일에는 공사장에 나가시고 일이 없을 때는 남의 땅을 빌려서 소작을 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침 일찍 벽지 공장에 나가서 야근을 하며 돈을 버시는 어머니 일상을 적어서 제출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선생님은 종례가 끝나고 나를 교장실로 호출했다. 교장실로 달려가니 선생님 서너 명과 학생 열 명 정도가 있었다. 주변을 살피니 탁자 위에는 포장된 선물박스 몇 개가 놓여있었다. 잠시 후 교장 선생님이 들어왔고 선물 증정식이 진행되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행사 사회를 보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선물 전달식, 다시 말해 영세민 (기초생활보장자) 불우 학생을 위한 조촐한 행사라고 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솔직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내게 영세민 이라니?!' 이런 것을 받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특히 반 친구들이 내 사정을 알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교장실에서 나와서 선물 포장을 뜯고 바로 자전거에 올라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선물상자를 열었다. 팬티와 러닝셔츠 같은 속옷, 그리고 생필품이 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대에서 받는 보급품 수준의 선물이었다.


저녁 늦게 부모님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고, 오늘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드렸다. 공장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셨다. "선생님이 착각했네, 우리가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 아니야. 이해가 안 된다." 어머니는 이렇게 나를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얘기만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 당시 아버지는 우리 중학교의 실내 강당 공사의 철근공으로 일하고 계셨다. 가끔씩 아버지를 태우러 오는 인부들 승합차 사이에 끼어서 학교에 등교한 기억이 있었다. 학교에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려서 제대로 인사도 않고 뛰어들어가던 기억. 학교에서는 아버지를 만날까 봐 공사장 근처로는 가지 않았던 나였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공사장 인부라는 것이 부끄러워 서였다. 아버지도 그런 내 행동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셨 듯. 그리고 이번 영세민 소동도 못배운 자신의이라는 생각을 하신 듯 했다 . 런 이유인지 아버지는 그날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인 1989년. 나에게는 이런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면서 한 해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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