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입문기
1989년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우선 머리를 잘랐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 그것이 당시 중학생의 상징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초롱초롱했던 맑은 목소리는 묵직하게 굵어졌고 얼굴 사이로 흐릿한 검은 수염이 시나브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뭔지 모를 어색함. 나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첫 등교일. 나는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내가 배정된 중학교는 천안 시내 중심에 있었다. 차암동부터 학생과 직장인들을 가득태운 만원 버스를 타고 천안역까지 나간 후에 다시 10여분을 걸어야했다. 버스가 자주 있지 않았기에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만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 날에는 동네 형들을 따라서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선배들은 학교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7시 40분쯤 학교 앞 오락실에 들려서 게임을 즐기고 8시쯤 전력질주하며 학교로 달려갔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형은 중학생이 되었다며 담배를 권하기도 했다. 아침 보충수업은 필요없다며 오락실을 더 즐기고 학교로 가자는 선배들도 있었다. 역시 우리 동네 형들은 만만치 않은 불량 선배들이었다. 어찌되었던 첫 날부터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선배들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다. 동네 형들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무서운 나의 할머니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락실은 동네 형들과는 아니지만 하교 후에 학급 친구들과 찾는 특별한 공간이 되긴 했다. 당시 출시된 스트리트 화이터 1과 2 게임은 우리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확실히 털어가는 최고의 격투기 게임이었다.
어찌되었건 한 달 정도가 지나서 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형들과 만나는 것도 싫었고 따라다니는 것은 더더욱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였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통학길을 나섰다. 당시 어머니는 근처 공업단지의 동양벽지라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공장에 8시까지 출근해야 했기에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의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7시 30분쯤 공장으로 향하셨다. 다행인 것은 공단 근처에는 출근자들을 위한 택시가 많았다. 어머니는 공단 근처에서 그런 택시를 잡아서 나를 학교에 보내주셨다. 공단까지는 비포장된 농로를 따라서 20분 정도. 택시를 타면 10분이면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나는 편하게 중학교 교문 앞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일 1000원씩의 택시비는 버스 요금의 10배 수준이었다. 한 달 동안은 어머니의 배려로 택시를 이용했지만 그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어머니는 작은 자전거 한 대를 사주셨다. 결국 중학교 1학년 늦봄부터 나의 통학 수단은 자전거가 되었다. 열심히 고개를 넘고 공사 현장을 지나고 고가 도로와 도심의 큰 도로를 지나서 학교로 향했다. 자동차들이 지나는 길을 뚫어야 했기에 위험하기는 했지만 자전거를 타면 30분이면 충분히 통학이 가능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꾸준히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통학을 했다. 넘어져서 팔목뼈가 부러지고 살이 갈리기도 하고 흉터가 여기저기 생기기도 했다. 자전거를 몇 번이나 도난 당하고 부서지고 망가지기 일쑤였지만 결국에는 자전거가 나의 청춘시절 발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질풍노도 사춘기는 자전거와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