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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Nov 09. 2020

내가 당신의 행운이 될 수 있다면

엄마의 삶은 퍽 고단했다.


  나는 삼 남매 중에 둘째다.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정도가 살짝 심한. 소위 말해서 장녀 같은 스타일의 둘째였다. 자라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 중 한 가지는 '우리 엄마 아빠는 왜 애를 셋이나 낳았을까?'였다. 도도하고 다소 신경질적인 성격의 언니와 허구한 날 사고만 치던 남동생. 그 둘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낀 내가 두 번째로 많이 한 생각은 이거였다. 아, 적어도 나만큼은 속을 썩이지 말아야지. 저 두 명이 속 썩이는 것만으로 우리 집의 지랄 총량은 이미 채워졌으니.


  학창 시절 아빠는 사업을 여러 번 말아먹었다. 딱 봐도 장사 수완이 없었는데도 자꾸 일을 벌였다. 그것이 정말 돈을 벌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사장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빠의 명함은 해를 거듭할 때마다 여러 번 바뀌었다. 화장품 회사, 골프 사업, 그리고 웨딩 업체에 이르기까지. 촌스러운 디자인의 화장품 사진을 등록하고 상품 설명을 쓰는 일을 하면 얼마간의 용돈이 내 손에 쥐어졌다. 쓸데없이 화려한 분홍 빛깔 스킨이 적용된 화장품 회사 홈페이지를 보며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생각했다. 나라도 이건 안 살 것 같다고.

  그리고 예상대로 아빠의 다양한 명함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병원 행정팀에서 일하던 월급만으로는 애초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한때 사장을 꿈꾸던 아빠는 그렇게, 2억이라는 빚을 폭탄처럼 떠안고 월급쟁이로 돌아왔다.

  가끔 엄마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당시 우리가 살던 낡은 빌라의 전세금조차 2억이 안 되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생긴 빚이 2억이라니. 당장 그 달에 나가야 하는 생활비와, 어린 우리 삼 남매를 보며 엄마의 작은 어깨가 느꼈을 부담과 압박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나는 더 숨을 죽이고 지냈다. 엄마는 늘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였고 우리의 살림은 빠듯해 보였기 때문에, 갖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말해 본 적 없었다. 엄마는 내가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사 줄 게 분명했지만 엄마의 어깨를 더 무거워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식이 원하는 걸 사줄 수 없다면 엄마의 마음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반면 막내인 남동생은 달랐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싶다고 말했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안 된다고 하면 떼라도 써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동생을 나는 오래도록 미워하고 증오했다. 사실 그건 나쁜 게 아닌데, 자연스러운 거였는데. 단지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난은 나를 지나치게 일찍 철들도록 만들었다.


  엄마가 부지런히 허리띠를 졸라매어 가정을 건사하고, 세 자녀를 키워내고, 한 달에 단돈 얼마라도 빚을 갚는 동안 아빠는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하루는 일찍 들어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빠에 대한 보복으로 엄마는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아빠는 겨우 문을 따고 들어와 언니와 나, 동생이 잠들어 있는 안방 문을 두드렸다. 좁은 방에 가득 깐 이불에 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누워 있었다. 잠이 덜 깬 귓속으로 날카로운 술주정이 흘러들어왔다. 반쯤은 잠에 취한 채 겁에 질려 웅크린 나를 엄마가 가만히 토닥였다. 착하지, 괜찮아. 다시 자도 돼.

  아마도 엄마의 새벽은 길디 길었을 게 틀림없다.




  두 살 위의 언니와, 빠른 년생인 나는 연년생처럼 자랐다. 우리는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데 성공했고 언제나 한 학년 차이였다. 비록 우리가 스카이캐슬에 살지는 못했어도- 자녀 교육에 대한 엄마의 열정만큼은 대치동 엄마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없는 살림을 쪼개어 피아노를 가르쳤고 나름 원어민이 가르치는 영어학원에 우리를 보냈다. 글쓰기에 제법 소질을 보였던 언니와 나를 위해 무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인천의 독서논술학원을 함께 다녀 주었다. 그 시절의 여성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못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엄마에게, 우리가 대학에 가는 것은 오랜 꿈이었다.

  언니가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서울의 4년제 대학에 붙었을 때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엄마는 오랜 한을 풀었다는 듯이 기뻐했고, 언니는 금세 엄마의 자랑이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년 후 또 입시를 치르는 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국문과 입시를 준비하던 나를 위해 엄마는 전국의 고등학생 백일장을 함께 다녔고 모든 실기시험과 면접고사 자리에 항상 곁에 있었다. 그렇게 나마저 '인서울'에 합격시킨 뒤에야 비로소, 엄마는 조금은 홀가분해진 표정이었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장학금을 받아보겠다고 근로장학생으로 일했고, 동아리 활동은 전공보다 더 열심히 했다. 4년 내내 알바도 했다. 교회에서는 온갖 활동을 하느라 주말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덕분에 5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고 그 시간 동안 엄마와 함께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성인이 되었으니 엄마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아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일한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내 힘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 그렇게 언니와 내가 졸업을 하고 취업을 준비할 때쯤, 자식을 거진 다 키워내고 '이제 조금 편해질' 때쯤.

  엄마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는 그 많고 많은 병 중에서도 왜 하필 이런 지독한 병에 걸린 걸까. 유전병력도 없고 한 번도 크게 아픈 적 없었던 엄마에게 이런 어마 무시한 병이 찾아온 이유는 뭘까. 어쩌면 지지리도 고단했던 엄마의 삶이, 무거운 짐을 지고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견뎌온 삶의 무게가- 조금은 편해져도 될 이때에 방심하자마자 한꺼번에 엄마를 덮쳐버린 건 아닐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게 제법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또 엄마의 투병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억울하고 미안하고 또 화가 나서 한없이 힘겨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지나온 엄마의 시간이 너무 고단했기 때문일까.

     

  엄마의 투병 생활을 함께하며 오랜 기간 간병을 하면서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지난날 엄마의 힘겨운 시간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많은 힘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엄마에게 큰 힘이 되어주겠노라고.

  활동 보조 도우미도 간병인도 쓰지 않고 오롯이 엄마를 직접 돌보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엄마가 조금이나마 행복했으면 좋겠다. 가진 게 없는 딸이지만 부디 나의 존재가 든든하고 자랑스러웠으면 좋겠다.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불운했노라고 쉽사리 평가받을 법한 엄마의 삶이, 덕분에 조금이나마 다행스러울 수 있다면 좋겠다. 엄마의 불운했던 삶에 내가 행운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내가 곁에 있어서 엄마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감히 내 젊은 날들을 모조리 바쳐도 좋다.

  취업도 결혼도 당장 눈앞의 미래도 다 포기하고 그녀의 곁에 있는 이유다.  

  엄마를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언젠가 엄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아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있다. 엄마,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어? 혼자서 외로웠지? 너무 많이 힘들지는 않았어?라고.

  그렇게 물어볼 용기가 나는 날, 엄마의 작고 마른 몸을 힘껏 안아 줄 생각이다.


대학교 시절, 미대 다니는 친구에게 엄마의 그림을 부탁했었다. 생일선물로 준 그림을 엄마는 액자에 넣어두었다. 여전히 곱고 예쁜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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