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입원이 끝나고 인공호흡기와 위루관에 적응하는 시간들을 거치면서, 비교적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숨이 찰 때마다 간헐적으로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던 엄마는 호흡기에 의존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호흡기 없이는 자가호흡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그날도 엄마의 침대 곁에 마련된 안락의자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해대며 잠과 치열하게 싸우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을 할 수 있었던 엄마가 내게 벽 쪽으로 돌아눕고 싶다고 했다. 의자에서 총총 일어나 엄마에게로 가서 앙상하게 마른 몸을 벽 쪽으로 뒤집고, 뼈마디가 닿아 아프지 않도록 베개와 방석을 다시 해 주었다. 문득 엄마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뭐라고? 가까이 다가가 엄마의 입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네가 나 때문에 고생해서 어떡하니..."
늘 듣는 말이었는데도 그날은 좀 달랐다. 그 말을 듣자마자 왜인지 하루의 고단함과 삶의 버거움, 그리고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엄마를 향한 안타까움이 새삼스레 밀려왔다. 아 뭐래~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니까 진짜.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의자에 돌아가 엄마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을 막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그것이, 엄마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문장이었다.
첫 입원을 마치고 퇴원한 뒤 시간이 지나며 입원의 기억은 조금씩 잊혀갔다. 인공호흡기를 착용하면서 더 이상 밤에 잠들 수 없게 되었고 이런저런 불편함들이 있었지만 늘 그렇듯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그 사이 엄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열이 나거나 숨이 찰 때마다 집 근처 병원에 두 번을 다녀왔다. 그때마다 4박 5일 내내 항생제와 수액을 맞았고 부지런히 흘러들어가는 포도당을 보며 왜인지 뿌듯해졌다.
두 번째 입원에서는 인공호흡기와 같은 회사에서 관리하는 산소발생기를 하나 더 사용하게 되었다. 엄마는 이제 인공호흡기를 통해 호흡하는 것도 모자라 기계가 발생시켜 공급하는 산소가 없으면 혈중 산소포화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인공호흡기는 엄마의 머리맡에서, 산소발생기는 베란다에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하며 부지런히 소음을 발생시켜 소음에 예민한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두 기계의 소음마저 서서히 백색소음처럼 느껴질 무렵이었다.
엄마의 컨디션이 며칠간 부쩍 좋지 않던 날, 퉁퉁 부은 엄마의 발을 주무르다가 발바닥이 파래진 것을 발견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얼룩이 양 발바닥 전체에 번져 있었다.
- 엥 언니 이거 봐봐, 엄마 발바닥이 파래졌는데?
- 어 뭐지...? 왜 그래...?
- 몰라... 없어지겠지 뭐.
단순히 곧 없어질 것이라고 치부했던 푸른 얼룩은 조그만 발바닥 위에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해서, 결국은 발바닥을 거의 뒤덮을 지경이 되었다. 마침 집에 방문한 가정간호사님에게 물어보니 뜻밖에도 동상인 것 같다고 했다. 비록 겨울이긴 했지만 그래도 집안에서 동상이 웬 말이람. 하지만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인공호흡기를 착용한 이후로 엄마는 한겨울에도 부쩍 더워해서 12월에도 선풍기를 틀어놓곤 했으니.
실내에서 동상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며 언니와 둘이서 혀를 찼다. 발치에 놓아두었던 선풍기 위치를 앞쪽으로 옮기고, 극세사로 된 두툼한 수면양말을 신겨주었다. 이렇게 해주면 좀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동상(?)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수면양말도 신겨주었으니 어서 낫기를 바라며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던 엄마가 그날은 유독 힘들어했다. 숨이 많이 찬 모양인지 부쩍 끙끙대고 용변도 거의 보지 못했다. 언니는 친구와 약속이 있었고 아빠는 술을 마시러 간 날의 저녁, 유난히 숨차 하는 엄마의 곁을 하루 종일 지키다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손가락에 끼우는 조그만 기계를 통해 산소포화도를 측정해 보았다. 산소포화도의 경우 보통은 95 이상이 정상이고 90 아래로 내려가면 응급상황으로 특정하는데 처음으로 엄마의 산소포화도가 80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85에 멈춰 있는 산소포화도 숫자에 순간 얼어붙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멍하니 서서 생각하고 있는데 숫자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70, 60, 그러다가 50까지. 산소포화도 숫자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건 처음인 데다 준비 없이 병원에 가는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혼자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어쩔 줄 몰라하는 공포의 30분을 보냈다. 밖에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치고 황급히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그사이 포화도는 34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119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산소포화도 수치를 묻는 구급대원의 말에 34라고 답하자 34라고요? 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문이 돌아왔다. 지금 가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기고 난 직후 (엄마가 곧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경찰에게서 전화가 와서 현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산소 수치를 보며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고 엄마는 놀랍게 그 와중에도 묻는 말에 눈으로 대답할 만큼 의식이 있었다.
엄마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옮겨졌다. 아빠는 이 와중에 또 술을 마시러 가서 집에 없었다. 응급실 의자에 앉아 온갖 심한 말들을 생각하며 엄마의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응급실에 가면 하게 되는 검사는 늘 똑같았다. 피검사를 통한 혈중 이산화탄소 수치 검사, 소변검사, 엑스레이 촬영 등등. 언니와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기를 한참만에 검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폐렴이라고 했다.
폐렴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자가호흡이 되지 않는 루게릭 환자의 사망원인 1순위가 폐렴이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어서 겨울에는 베란다 문 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감기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집에서도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바로 입원 수속을 밟고 병실로 올라갔다. 엄마를 침대에 눕히고 나자 간호사가 와서 이것저것 필요한 정보들을 물었다. 생년월일과 나이, 가족력, 앓고 있는 질병 등 문진은 꽤나 상세했다.
- 그런데 선생님, 엄마 발이 파란데... 저건 왜 그런 거예요?
- 아, 이거 청색증 같은데요? 혈관에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증상이에요.
동상이라는 말을 믿었던 우리가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발이 파랗게 변했을 때 엄마의 폐가 조금씩 상하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병원에 왔더라면 좀 달랐을까. 쉽사리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하나뿐인 이불을 나눠 덮고서 번갈아 두 시간씩 자며 보호자 침대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밤은 춥고 어둡고 또 길었다.
언니와 함께 보낸 밤들
병원에 다시 아침이 왔다. 첫 회진과 함께 무시무시한 검사 결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폐렴에 더해서 기흉, 설상가상으로 장폐색까지. 장이 마비되어 제대로 변을 볼 수도,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꼬박 금식하고 수액으로만 연명해야 한다고 했다. 위루관으로조차 밥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액을 맞아야 한다면 더 이상 집에서 케어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엄마는 영영 집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마침 언니가 일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빠가 오전, 언니가 오후, 내가 밤으로 하루에 8시간씩 나누어 3교대로 간병을 하기로 했다. 나는 매일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 엄마의 곁에서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가서야 죽은 듯이 잠들었다.
마비된 장이 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 아침, 아빠와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원 문을 나섰다.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문득 병원 앞에 심긴, 꽃과 열매가 모두 지고 남은 겨울나무의 마른 가지가 보였다. 겨울바람보다 더 스산한 절망이 밀려왔다. 아, 아마도 엄마는 앞으로 영영 집에 돌아오지 못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