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비루함과 무용함을 끌어안게 되는 순간들
‘빈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그 사람의 '문화 자본'이라는 말을 들었다.
주말 아침 혹은 퇴근 후 저녁, 그 공백의 시간 동안 너는 뭘 하고 있었나, 얼마나 열심히 움직이며, 빈 시간에도 과연 생산적으로 살고 있었나,라고 묻는 질문이었다.
'자본'이라는 말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매직 워딩이다. 그 사람의 ‘문화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말보다 ‘문화 자본’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말하면 우리는 ‘혹시 나만 이 자본주의 시대에 뒤처지나’ 생각하게 된다. ‘태도’는 상대적이지만, ‘자본’은 필수적이고, 없으면 열등감마저 심어주니까. 그래서 ‘문화 자본’이라는 말은 ‘빈곤’과 ‘계급’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불안감을 겨냥하고,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문화적 우위 요소 만들기에 집중하게 한다. ‘빈 시간’을 그대로 놀게 두지 말고, 계속 무형의 뭔가를 생산하라,라는 무언의 지시처럼 말이다.
출판사에 있을 때 이런 식의 워딩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자기 계발서나 인문서를 만들 때, 너만 모르고 있는 ‘이것’, 성공한 사람들은 다 하고 있는 ‘이 방법’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런 점에서 ‘○○ 자본’은 어디에나 붙일 수 있고, 누구나 자극할 수 있는, 그러니까 요즘과 같은 결핍의 시대에 가장 쉽게 잘 팔리는 최고의 단어가 아닌가 싶다.
진 회장님은 말씀하셨지. “문화 취향, 그게 돈이 됩니까”
거기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분주히 움직인다. 빈 시간에도 스스로의 불안과 욕망을 동력 삼아 생산적 인간이 되기 위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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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공백의 시간에 어디에 있었나.
동네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주말, 요가를 하며 몸을 살피는 시간, 아침 토스트를 담을 예쁜 그릇을 고르고, 애인과 함께 장을 봐서 저녁을 만든 후 맥주를 기울이는 시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그동안의 생활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 들이, 거기에 있었다. 가장 약한 부분을 꺼내놓고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더 단단해진 우리를 발견한 시간들이 있었다. 도저히 자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무위의 시간들. 그리고 가끔 이렇게 평범한 일상과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글로 뱉어내며 시간을 보냈다. 일기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하찮은 것들을 적으면, 다행히도 그 하찮은 일상이 귀여워지기도 했다.
이 시간들은 자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천천히 나를 이루는 부분이 될 것이다. 뭔가로 채우려기보다 비워진 채로 기다리는 마음들로 말이다. 그 '빈 시간'에는 누구든 초대하고, 안부를 묻고, 같이 기쁘고 슬퍼하는 마음. 그렇게 다시 흩어지는 이야기들.
나와 당신 사이에는 그런 시간, 문화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