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다정해지는 순간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대성당>에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이를 잃고 지쳐있던 그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다 우연히 빵집 주인이 건넨 갓 만든 롤빵과 커피 한 잔을 먹게 되는데, 이상하게 그게 너무 잘 넘어간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 순간의 따뜻한 어떤 것. 아마 나에게도 그런 게 필요했던 것 같다.
▪︎
나는 감정적으로 지쳐있었다. 이별은 생각보다 갑작스러웠고, 힘들었다. 욕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가 주저앉았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걷다가도 걸을 힘을 잃었다.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있기로 했다. 해가 뜨고, 지고. 며칠이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고, 나는 사물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꿈에서는 매우 분주했는데, 늘 다치는 꿈을 꿨다. 다가오는 차와 충돌하고, 누군가 던지는 물건에 맞았다. 신기하게도 꿈에서도 그 타격감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깨어있을 때 억눌렸던 심리적 통증이 꿈에서는 물리적인 통증으로 나타났다. 꿈속으로도 도망갈 수 없었고, 갈 데가 없었다.
▪︎
유네와 엘린이 안면도에 가자고 했다. 나는 차 뒷자리에 앉아서 두 사람의 아늑한 목소리를 들으며 갔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쯤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고, 우리는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것이 사라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물속으로 차갑게 식으며 가라앉았다. 그건 이제 그렇게 멋있지도, 우울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장면이었다. 하루가 또 지나갔어. 요새는 하루가 이렇게 참 잘 가. 슬픔도 기쁨도 없이. 다행이야.
▪︎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네가 냄비에 불을 올린다. 방 안에 계피향이 진하게 나기 시작하는 걸 보니 뱅쇼였다. 유네가 자몽과 사과, 레몬과 정향 등이 선물처럼 담겨 있는 웰컴티를 건네준다. 오랜만에 내가 가장 편하고 따뜻해지는 공간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손끝과 발끝이 항상 차가운데, 뱅쇼를 마시니까 온몸이 따뜻해져. 서양에서는 이걸 감기약으로 마신다는데, 나도 마치 내내 앓았던 미열이 내려가는 것 같아. 여러 가지 기분이 몰려왔다. 달콤하고, 씁쓸하고, 시큼하고, 매콤한. 뱅쇼의 맛과 같은.
유네와 엘린이 분주히 저녁을 준비한다. 나는 오랜만에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