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사슬이다. 지난날의 무모와 광기를 변명하기 위해, 낭비된 시간에게 진 무위(無爲)의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앞날의 비참과 통한을 피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이 강력한 적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中
방통대 입학의 이유를 위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방통대는 학점 취득이나 학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닌 과정 자체가 목표였다. 졸업 즈음엔 보다 나은 사람, 더 익힌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학금을 상상하며 호기롭게 덤볐던 일곱 번의 학기 동안 만족스러운 성적을 받진 못했다. 주 6일 출근, 때론 출퇴근 전후 학원이나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사일정에 맞춰 과제를 내고, 시험을 보기에도 바빴다. 출석 대체시험이나 기말고사를 보러 간 서울지역대학에서, 학보 기사에서 지긋한 학우들의 열성을 보며 부끄러워진 적도 많았다. 그러다 마지막이었던 1학년 1학기에서 처음으로 올 A라는 결과를 받았다. ‘유종의 미’라고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얽히고설킨 과거의 시간을 후회하거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지 말라는 위로 같았다.
나는 배움이 ‘향상심’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부족’에 대한 열의를 느낄 때, ‘내가 맞다’라는 자만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배울 자세가 준비된 것이다. 삶의 면면이 배울 것 천지다. 싫은 것과 좋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기쁜 것과 슬픈 것, 신나는 것과 지루한 것, 교양 있는 것과 너절한 것, 냉(冷)한 것과 열(熱)한 것, 채운 것과 비운 것. 삶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라고 했던가. 세상에는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하나의 시련은 하나의 배움을 남기고, 그 하나의 배움은 다음 시련에서 두 개의 시각을 열어준다. 때문에 모든 현상에 눈과 귀를 열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인 ‘향상심’은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향상심을 잃지 않는, 가장 쉽고 효용한 방법은 역시 독서다. 다독가가 아니라 급급한 일들을 해치울 때면 늘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지만 독서만큼 생산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이 없다. 살면서 잊고 싶지 않은 책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마주쳐 무뎌진 감각을 깨우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이 그랬다.
스물두 살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할 때를 제외하곤 독서와 필사가 주 일과였다. 그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알았다. 풍문으로만 듣던 철학자 니체의 책, 어렵기로 정평이 났다는 그 두꺼운 책이 내게는 왠지 엄격하면서도 친절한 선생님을 만난 듯 여겨졌다. 첫 만남이 해설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선입견 없이 그저 ‘차라투스트라의 말’로써 받아들인 첫인상이 수년 후 읽은 해설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그의 관점을 전도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의외였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자신의 '아침'을 찾았고, 작렬하는 태양 아래 낮을 맞이했다. 영화 한 편을 본 듯 나는 그저 관찰자였던 셈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초인이 되는 법을 알았다거나 사자에서 아이가 되진 않았음은 물론 내게 주어진 아침과 태양 역시 철저히 내 몫이었다.
<젊은 날의 초상>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 열아홉 고향으로 돌아온 ‘나’의 회고다. ‘나’는 늦은 진학, 그리고 진로와는 관계없는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속하고 치열하게 고뇌한다. 낭비해온 시간,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가난하고 젊었던 여름을 구석구석 헤집는다. ‘하루 세끼 먹을 것과 누울 잠자리를 근심할 필요가 없던 세월’을 걷어차고 ‘아스팔트 위의 방랑자’가 된 ‘나’. 시대적 배경도, 성별도 다르지만 흔들려 걷는 ‘나’의 등 뒤로 내 그림자가 겹쳐 더욱 기다란 잔상을 남겼다.
“세상 일이 항상 그렇듯, 꽃답다는 것은 한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젊은 날의 초상> 속 첫 문장처럼 친구들에게 매달리던 학창 시절의 나에게서 벗어나 이도 저도 아닌 현실을 마주한 순간의 헛헛함은 내게 파격적인 선택을 강요했다. 동창, 심지어는 친했던 친구와도 연락을 끊었고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학원을 다녔다. ‘이룬 자의 자랑’쯤으로 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기계발서를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가족과의 거리를 좁혔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는 지금껏 하지 않는다. 철 모르고 날뛰던 방랑 18세가 귀가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위인들의 소음에 귀먹고, 소인배들의 가시에 마구 찔리는 일체를 피해 고독 속으로 달아났”던 것 같다. 가끔씩 닿았던 친구들과의 연락은 지지부진, 더는 마음을 터놓을 수 없어져 늘어난 관계의 거리는 탄력을 잃은 채 먼발치에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혼돈의 시기는 온다. 테트리스를 하면서 칸을 끼우지 못해 솟아오르는 블록을 속절없이 바라만 보듯이, 퍼즐에서 조각 하나를 잃어버려 완성할 수 없듯이, 심혈을 기울인 도미노가 한순간에 무너지듯이. 순서와 규칙으로 영위되던 삶의 모양은 어떠한 계기에 의해 일순간 파괴된다. 혼돈스러운 상태는 곧 선택해야 할 타이밍이다.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는 딱히 선택할 것이 없고,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건 현재가 별다른 자극 없는 잠잠한 삶이라는 방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