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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Sep 15. 2022

신문지

자정, 나의 하루 중 두 번째 아르바이트가 적막 속에 시작되었다. 무색무취한 잿빛 종잇장들이 널브러진 책상, 언뜻 단정해 보이지만 추레한 야간 당직 기자들이 있는 곳. 방송국 보도국 사회부다.


"안녕하세요. 00 방송국 보도국 사회부인데요. 현재까지 화재나 사고 없었나요?"

전국 팔도 소방서에 전화해 그간 별일이 없었는지 묻는 일, 의미 없는 제보 전화 중 유의미한 것을 골라 기자에게 전달하는 일, 사고가 나면 참혹한 현장 사진을 인제스트팀에 넘기는 일, 5시쯤이 되면 1층으로 내려가 손수레 가득 신문 더미를 가져오고, 종류별로 한 부씩 묶어 보도국 수뇌부들에 전달하는 일이 이곳에서의 내 역할이었다.


이미 주 6일 7시간씩 일을 하고 있음에도 일주일에 세 번, 야밤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까지 이곳으로 달려오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내 진로와 가닿은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읽는 것 말고 쓰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들이 내쉬는 공기 안에 잠기고 싶은 거였다. 휘영청한 형광등과 빽빽하게 줄지어 선 책상들이 오와 열을 맞춘 이곳은 짐짓 상상했던 것보다 시시했지만, 내 마음만은 처음 사교계에 발을 들인 시골 소녀처럼 모든 것이 분명하게 새로웠다.


귤의 과즙이 흐르듯 째깍이던 시곗바늘이 5시를 알리면 야밤의 마지막 미션이 시작됐다. 한기가 도는 1층을 지키는 보안요원에게 카드키를 받아 우편물실에 진입하고, 임원들의 이름이 적힌 우편함을 연다. 정리되지 않아 흘러넘치는 우편물에 생채기 나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 혼잡한 모양새 또한 우편함 주인의 마음일 테지. '신문만 가져가는 거예요' 밤손님이 된 기분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강조해서 되뇌곤 했다. 신문을 모두 정리해 배분하고 난 새벽 6시에는 여지없이 졸음에 옴짝달싹 묶였다. 어찌저찌 시간을 흘려보내고 7시가 되면 나는 그곳에서 놓여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와 눈을 맞춰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보안요원과 청소 아주머니뿐이었다. 기자들은 표정이 없었다. 밤새 화재나 사고 소식을 기다리고 전달하는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낯빛에 드러나는 다라움, 무관심은 왠지 나를 작게 뭉뚱그려놨다. 인사를 받아주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책상 위에 다리를 턱하니 올린 채 곯아떨어진 인사(人士) 옆에 신문더미를 살포시 놓고, 지난 신문을 수거해 가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간혹 "어제 보니 00 신문 없었다. 똑바로 전달하라"는 컴플레인만이 나와 그들의 소통이었다.


제보를 핑계로 "기자를 바꾸라"며 생떼를 쓰는 사람, 거나하게 취해서 술주정을 하는 사람, 신들린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람,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니 가만두지 않겠다는 사람·····. 그들과 수화기로 연결되는 순간마다 제대로 타지 못해 매캐한 연기만 솟아오르는 화덕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내가 신문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본래 신문과 같은 갈래이나 간극은 비할 바 없는, 고고하고 열띤 신문과 그를 멋대로 집고 버리는 사람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는 신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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