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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Dec 20. 2023

무궁화호 3호차를 마시며

밤이 꼬리를 늘리는 야행성
그 안에 잠자코 사는 나
마음만큼 때가 따라주지 않는

기차 여행에서만큼은
언제나 이른 첫차를 마신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
동트기 전 마지막 어둠을 쓸어 담는 환경미화원의 비질
팔짱을 낀 채 쪽잠을 펼치는 직장인의 고요
남들보다 반나절을 더 보낸 청춘의 숙취를 눈에 담으며
일상 아닌 여행의 하루를 상상한다

차분히 소란한 서울역사 안
양손 가득 보퉁이를 든 채 잘똑이는 아주머니와
벽걸이 TV 속 뉴스에 시선 고정한 아저씨
아무런 표정 없이 쟁반을 옮기는 빵집 주인과
햄버거만큼 손님을 재빨리 해치우는 패스트푸드점이 스쳐 보인다

가쁜 숨과 느긋한 숨이 뒤섞일 제
전광판의 낯익은 목적지가 나를 불러들인다
더는 기차표를 손에 쥐지 않고
간식카트의 바퀴도 굴러오지 않을 테지만
나직한 습도의 내음을 맡으며 제자리를 찾는 순간,
열차와 나는 운명 공동체가 된다

정확한 목적을 품고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
기다란 창유에 뒤섞이는 시점의 풍경
이따금 빗발이 때릴 때면,
선로를 미끄러지는 바퀴의 반드러움이 부러워진다
멈추지 않음으로 우적을 떨쳐내는 불굴도 탐이 난다

열차가 정거하는 역의 수만큼이나
갖가지의 사람과 사물이 경유하는 삶
단순히 스친 뒤 생채기를 내거나
파도치는 바닷가 백사의 운명마냥 지워지고
때론 한참 머물면서 지긋한 바닥을 함께 깔고 앉는다

내게도 있었다
한쪽 팔을 부대끼며 화사히 충돌하던 옆자리가,
같은 곳을 보고 걷고 배회하며 나부끼던 웃음소리가,
흐려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간이역 같은 그런 이들이,
내게도 있었다

새롭고 빠른 것은 편하다
낡고 느린 것은 불편하다
그래도 나는 낡고 느린 것이 더 좋다
대궐 같은 남의 터보다 자기만의 골방이 편한 것처럼
가속하는 시간의 자락을 붙잡아두고 싶은 것처럼
약간은 갑갑하고 조금은 구겨진 내 삶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처럼

옛날 같진 않아도 여전히 많은 것이 그대로인,
느려도 결국 원하던 곳에 나를 놓아주는 무궁화호 안에서
나의 침체와 느린 걸음을 안는다
잘 마셨다, 3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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