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4일째를 보내던 날, 바다 건너 책이 도착했다. 처음으로 제주에서 주문해본 책, 3분 거리 바다를 눈앞에 둔 나는 CF처럼 해안 도로를 달리는 청량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평생을 약속했던 동반자와의 삶이 조각난 후 온갖 불행을 긁어모아 불안 속에 전전했던 저자 벨라 마키. 낡은 레깅스 위에 티셔츠를 걸치고 아파트에서 30초 정도 떨어진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나섰던 그날, 그녀는 변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로는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가 그렇듯이- 약간의 시행착오와 함께 희망과 새 삶을 되찾았다.
'뛴다'는 단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내가 마지막으로 뛰어본 건 언제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 열나게 뛰었던 걸 제외하면(겨우 17초) 버스를 붙잡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기다림이 싫다는 정확한 목표로 인한 뜀박질이었다.
예전에 즐겨보던 한 유튜버가 브이로그 속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런던의 거리를 러닝하는 일상을 공개했었다. 빠알간 다리가 있는 강가 옆으로 이국적인 곳을 달리는 그 유튜버를 보면서 '저런 곳이면 뛰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곤 우리 동네는 뛰기엔 적절치 않다, 아는 사람 마주치면 어쩌지, 공원까지 가기엔 귀찮아, 운동할만한 옷이 없어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는 뛰기에 아주 적절하고, 아는 사람도 없으며 공원은 코앞에, 옷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환경이 됐음에도 내 의지는 적절치 못한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걷는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다리는 금방 저리고 몸은 무거워졌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동안 줄넘기를 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체력은 바닥이다. 학창 시절엔 반에서 계주 선수로 뛰거나 오래 달리기 1등을 도맡아 했는데 지금은 뛸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남자보단 여자가 운동이나 '뜀'에 있어서 취약한 문화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땀 흘리는 남자애들과 달리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애들이 앞머리를 사수하기 위해 시선을 곧게 두지 못하고 도둑 달리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머리가 망가지니까, 땀 냄새 때문에, (남자애들 보기) 창피해서 등등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언젠가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 앞머리를 신경 쓰지 않고 뛰게 되었을 때,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저자 벨라 마키가 달리기보다 더 많이 언급한 것은 '불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스멀스멀 형성된 불안증은 때에 따라 발전하거나 심화되면서 삶에 대한 의지를 박약하게 했다. 강박장애, 공황장애, 공포증(광장공포증·폐쇄공포증 등), 사회불안장애(사회공포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범불안장애 이름도 갖가지였다. 각 불안장애의 증상들을 자가 진단한 결과, 내가 해당되는 건 얕은 범불안장애 정도였 다. '걱정을 달고 사는' 불안 심리다. 그 걱정이 구토를 유발하는 정도 까진 아니지만 걱정이 생각을 물고, 생각이 걱정을 물어와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피로감, 스트레스 등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생각과 기우(杞憂)가 많은 타입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나만의 성향'으로 치부하고 해소할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나를 다스리는 건 내 정신이고 내 의지박약에 대한 문제 또한 정신을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체적 활동과 생각의 고리를 연결 짓지 못한 탓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듯이 몸이 무거워지면 마음도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딱히 도전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정말 싫어하는 말이다. 한계를 구분 짓고 나이와 때에 흰 수건을 넘기는 일, 그 자체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10장 함정과 실망을 통해 경고문을 미리 게시한다. 달리기 할 때 멋짐을 포기해야 하고, 뛰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애정이 금방 생기진 않을 거라고. 많이 넘어지기도 할 테고 사회생활과의 균형도 필요하며 다이어트 목적으로만 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책을 덮고 나니 처음에 상상했던 멋진 운동복 차림으로 해안도로를 달리는 상상은 쫄아들었다. 대신 지금의 내가 가진 모습 그대로와 길 하나가 떠오른다. 고상치 못한 포즈더라도 어쨌든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머릿속에 얹어진 짐과 실뭉텅이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