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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Jan 15. 2020

춤을 추었으면 좋겠어

잘 추지 않아도 좋으니 멈추지만 말고

운동, 그도 아니면 책, 그것도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찌 됐든 밖에 나가야만 했다. TV 프로그램에서도, 책에서도, 즐겨보는 유튜브 속에서도 스스로의 삶을 정리하고 계획하는 것만큼 움직이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자꾸만 말해왔다.


걷는 거라면 꽤나 자신 있는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적이 없으면 걷질 않았다. 그마저도 병원, 다이소, 테이크아웃할 때뿐, 가벼운 산책마저도 흥미가 없었다. 거리가 꽤 되는 곳들은 전부 차로 움직였고 가끔씩 집 앞 버스 정류장, 집 근처 지하철역 정도에서 내 GPS는 맴돌았다.


그저께부터 매일 아침 집 근처 도서관까지 걸어 다녀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루에 책 한 권씩만 딱 빌려서 대출과 반납을 반복하는 트리거를 심어둘 생각이었다. 아침에 가는 건 실패였지만 해가 저물기 전 오후, 집 밖을 나서 도보 25분 거리 도서관으로 향했다. 홈웨어에서 단출한 추리닝으로, 맨발에 양말을 씌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숱한 게으름이 있었는지. 시린 바깥공기를 마시니 정말 상쾌하고 좋았다. 내친김에 멜론이 아닌 중국어 회화를 들으며 가기로 결심했다. '들어야 한다(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듣고 싶다(하고 싶다)' 생각하니 중드를 볼 때처럼 흥미롭게 들렸다.


휴관일도 생각지 않고 나갔던 첫날은 걷는 것 말곤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 '오늘은 휴관일입니다'라는 문구를 보자 1초 허탈하긴 했지만, 오히려 휴관일을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이었다 싶었다. 휴관일을 알았다면 '휴관일이 아닌 내일부터 걷자' 미뤘을 테니까. 역시 모르는 게 약!


둘째 날인 어제는 오후 4시가 좀 넘어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교, 하원 시간이라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거리 위를 채웠고, 그 시간을 훌쩍 지나온 나는 홀로 흑백이 된 듯 씩씩하게 나아갔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만 않을 정도로 기초 중국어를 읊조리며 도착한 도서관은 내가 전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과 어제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지만 내게 '정말 오랜만의 방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노트북, 책, 간행물, 수험서와 함께 각자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이용자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본 아침 출근길에서처럼 나 혼자 한량이 된 기분이었다. 발걸음, 책장 넘기는 소리도 조심스러운 고요한 그곳에서 내 마음이 가장 시끄럽게 요동쳤다.


생각해둔 책을 800번대 책장에서 금세 꺼내 대출만 하고 나가려던 찰나, 빈자리 하나가 보여 나도 모르게 앉았다. 도서관은 그냥 책만 빌려서 나가기엔 너무나 아까운 곳임이 틀림없다. 읽어보고 싶은, 읽지 않은 책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단 한 권의 돛단배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에코백에 네 권의 책을 담아 밖으로 나왔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운동할 수 있는, 걸을 수 있는, 도전할 수 있는 적당한 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행함'과 '행하지 않음'이 있을 뿐. 빌리기 전 잠시 읽고 나온 책 18페이지에는 내게 그걸 상기시켜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계속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냐, 춤을 출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면, 나는 네가 춤을 추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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