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인의 '낙화' 도입부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난 엄마의 권유로 더러 시를 외우곤 했다. 절이나 문학관에 적힌 좋은 시나 글귀를 보면 엄마는 "한 번 외워봐" 스치듯 말하곤 저만치 걸어갔다.
"저걸 지금 당장 어떻게 외워" 하다가도 엄마와 더 멀어지기 전에 후다닥 머릿속에 집어넣고 달려가 낭송을 했다. 그야말로 스펀지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외울 수 있는 시는 낙화 하나뿐이지만 가끔 되뇔 때마다 문장의 깊이가 더해짐을 느낀다.
어릴 땐 시 쓰는 게 좋았다.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수필 대신 꼭 시를 썼다. 시 안에 내 생각을 절여두고 나만의 의미를 정의하는 게 좋았다. 나이가 드니 시는 언제 썼나 싶게 주구장창 수필만 쓰고 있다. 주워 담지 못하고 늘어놓는 말만 많아진 걸까. 시라곤 휴게소, 전철역 화장실에서나 마주하고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흘려보내는 게 전부였다.
시험에 나올 영어 단락, 과제 참고도서, 유명하다는 문장형 제목의 에세이는 들춰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다. 안 사곤 못 배기게 만드는 굿즈와 리커버 에디션도 수도 없이 쏟아진다. 그 와중에 시는 읽지 않아도 될 자유를 준다. '이 책 좋다'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 시 좋다' 한 사람은 별로 없다.읽지 않아도 나를 다그치지 않는 시. 원래 말 않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시와는 멀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 시인은 등단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시에 등을 돌린 채 세상의 건조함을 절실히 느낀다. 갈색병, 50만 원짜리 수분크림으로도 채울 수 없는 초근함이 시 안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