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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Nov 14. 2021

어질러지는 게 당연하지

[한편보고서 10]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넷플릭스

라라 진(라나 콘도어 분)은 대학 입학을 앞둔 언니와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동양계(한국인?)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만이 세 딸의 울타리다. 특별히 못나지도,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라라 진은 짝사랑마저 언니한테 뺏기고 만다.(물론 라라 진의 언니와 짝사랑 상대 조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기에 뺏은 거라고 볼 순 없지만)

ⓒ넷플릭스

라라 진을 딱하게 보는 건 아버지도, 친구들도 아닌 이제 겨우 11살이 된 동생 키티. 누구의 소행인지는 키티와 관객만 알 수 있는 사고가 벌어진다. 라라 진이 차곡차곡 비밀 일기처럼 썼던 짝사랑에게 보낸 편지가 그 수신인들에게 정확히 전달된 것.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지 모를 편지를 뒤늦게 받게 된 남자들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게이로 밝혀진 루카스를 제외하곤 피터(노아 센티네오 분)와 조시(이스라엘 브루사드 분)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이미 지나간 짝사랑 피터보다 진행형인 조시의 반응이 훨씬 두려웠던 라라 진은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며 피터와 가까워진다. 급기야 피터는 라라 진에게 "너는 조시에게, 나는 젠에게 각자 목적이 있으니 우리 사귀는 척하자"고 제안한다. 야심 차게 계약서까지 쓰는데, 아무튼 다른 길로 새기 딱 좋은 시작이다.

ⓒ넷플릭스

라라 진에겐 엄마가(돌아가셨다), 피터에겐 아빠가(이혼하셨다) 없다. 계셨다면 너무나 좋았을 딸의 엄마와 아들의 아빠. 이들의 부재는 두 사람이 공통된 아픔을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피터와 함께 있는 게 너무 편해서 정말 사귀는 것 같이 느껴진다던 라라 진.


문득 자신의 감정을 비추어보는 순간, 부담감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온다. 진실된 관계가 아니라는 느낌,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그 남자가 다른 여자(젠)에게로 언제든지 가버릴 수 있다는 꽤 뚜렷한 확신과 그 꿈에서 깨는 즉시 내가 더 상처 받을 거라는 불안함. 라라 진은 그렇게 피터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한다.


계약서의 종착역이자 이야기의 결론이 도출될 스키 캠프. 솔직한 선택만큼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감추는 것에 대한 결과는 부정적인 몽상가가 되는 길뿐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은 다음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잠을 잤다는 부푼 만족감에 깨곤 한다. '어제 그것. 꿈이 아니었지?'와 같은 행복한 물음 이후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자존감 없는 여자의 마음은 얼린 지 1시간밖에 안된 얼음처럼 무르다. 언제, 어떤 계기로도 믿음을 잃고 방황할 준비가 되어있다. 라라 진 또한 젠의 농간에 놀아나 피터로부터 도망쳐버렸다.


깜짝 이벤트로 집에 온 언니 마고와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온 피터, 그를 막는 조시. 라라 진을 중심에 두고 모두가 엉켜버렸다. 누구에게 사과를 할 지도, 받을지도 불분명한 상황.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은 최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마음처럼 어질러진 방을 치우고 내일의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이긴 하지만 삶을 포기할 게 아니라면 그 방법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거창하지 않을수록, 소소한 것일수록 좋다. 이 두려워 차 버리는 것과 차이는 결말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가 낫지 않을까. 위기의식과 상대를 핑계 삼아 차 버리는 것은 결국 버림받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넷플릭스

영화 속 두 사람은 역시 야무지게 손을 잡았지만 엔딩 크레딧과 검은 화면에 비친 내 모습만 남는 지금, 우리에겐 두 가지 물음이 주어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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