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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06. 2019

‘우리 안의 파시즘’대기업 노동조합

책 속의 사람들

우리 안의 파시즘

“정작 큰 문제는 대안 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사고와 운동 방식조차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사회 고유의 결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사학자이자 이 책 ‘우리 안의 파시즘’의 저자인 임지현 교수가 풀어놓은 이 문장만을 놓고 보면 마치 세간에 흔한 우파 지식인의 소리 같다. 그러나 임지현 교수가 이 책을 쓴 시점은 2000년 5월로 413 총선이 끝나고 난 직후다. 저자를 포함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일부 비도덕적인 후보자들에 대해 낙선 운동을 펼쳤던 총선연대의 분투를 아쉬워했던 시기였다. 처음 시도한 시민운동이 결국 지역주의를 넘지 못한 그 시점에 저자는 오히려 좌파 파시즘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자는 16대 총선을 두고, 권력이 이식한 지역주의라는 ‘내적 식민지’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의식 속에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집요하게 묻고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불렀다. 저자에 따르면 ‘일상적 파시즘’은 우파나 좌파, 양쪽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이고, 이는 16대 총선이라는 정치적 행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임지현 교수는 한국의 뿌리 깊은 지역주의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매우 견고한 결이라고 단언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 제기는 지금까지 한국의 비판 세력이 겨냥해 왔던 정치적 파시즘 혹은 제도적 파시즘의 극복이 그 자체만으로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극복 노력은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저자의 주장은 결국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교육을 하겠다는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그 교육의 주체는 바로 제도와 경험이다. 예를 들어 헌법에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상,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하고, 그러한 폐지가 사회 안전에 전형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교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라는 글에서 임지현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한다. 그는 일상적 파시즘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굴종하여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이 행사되는 보이지 않는 규율, 또는 교묘하게 정신과 일상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사회적 방식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잡식성 테러와 같아서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체정이든 그 무엇과도 손잡을 수 있고, 또 그 반대로 공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그중에서도 1997년 서울 대학교가 타교생이나 졸업생들의 도서관 출입을 막기 위해 학생증 바코드를 만든 사건과 1968년 파리의 대학생들이 24시간 내내 소르본느를 노동자들에게 개방한 사건을 비교한다.      


서울대학교가 도서관 출입을 제한한 것은 자교 학생들의 공부할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단순한 목적이 있었던 반면, 파리 대학들의 소르본느 개방은 엘리트 양성과 권위주의 구조, 학생들에 대한 가부장 주의와 학교-학부-학과 사이에 존재하는 철통 같은 위계질서, 학생들의 특권적 지위, 전문 지식의 신비화 등에 대한 비판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사학자 임지현 교수

임지현 교수는 파시즘은 단순히 권력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의 권력 기구가 위로부터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라면, 확대된 가족주의 혹은 연고주의는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담보하는 견고한 문화적 기제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예를 들어 이러한 문화적 기제가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여성을 향해, 가부장적 전통인 이른바 3K(부엌, 아이들, 교회) 의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심지어 절친인 루이제 카우츠키에게 남편의 권위적 행동에 저항하라고 지속해서 선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 자신은 첫사랑이었던 요기헤스와는 늘 종속적 관계를 유지하는 등의 모순적 행동을 보였다. 문화적 기제, 문화적 타성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사례이다.      


촛불 혁명이 한창이던 때, 한 정치인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혁명적 사건 뒤에는 늘 반혁명적 권력이 재집권하는 사례를 들어 촛불의 미래를 경고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4·19 혁명이나 민주화 운동 직후에는 항상 반혁명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서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을 지목한 것이다. 임지현 교수는 이 역시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로서 설명하고 있다. “변혁 운동이 지배적인 담론 구조와 코드를 공유하는 한, 변혁은 없다.”라는 그의 말은 일상적 파시즘의 결을 바꾸어 놓지 않는 한, 권력을 누리는 집단의 변화만 지속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이 책에는 임지현 교수의 글 외, 10개의 단문이 실려있다. 반공 포스터, 주민 등록제, 그리고 한국의 ‘군사주의’에 토대를 둔 반공 규율 사회의 집단의식이 권혁범, 김기중, 박노자에 의해 쓰였다. 그리고 한국의 가부장적 혈통주의에 대해서는 근대화 프로젝트, 성차별, 외국인 노동자를 주제로 김은실, 권인숙, 유명기가 글을 썼다. 김근, 김진호, 전진삼은 각각 언어의 문제, 종교의 문제, 그리고 건축을 통해 본 파시즘의 일상 문화를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문부식은 과거 독재정권을 돌아보며 잃어버린 파시즘의 기억을 되살린다.      


이러한 논문들은 한국 사회 ‘일상적 파시즘’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프리즘이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권인숙이 쓴 ‘진보, 권위 그리고 성차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한국 사회의 성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 문제는 이 책이 쓰인 2000년으로부터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인류의 과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이 논문에는 자유와 민주, 그리고 정의를 외쳤던 운동권 학생 출신, 소위 ‘학출’들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 지적되고 있다. 권인숙은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했던 한 여성 운동가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한 번은 내 상사라는 그 형이 나이 어린 고졸 출신 실무자들을 모아 놓고, ‘군대식으로 내가 하는 것 복창해 봐, 손님이 오면 일단 테이블에 앉힌다.’ 이러는 거예요. 애들은 막 따라 하고, 어떻게 운동권에서 일했다는 사람이 저렇게 할 수 있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빵(감옥)에도 갔다 오고, 저 사람의 인격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군사 문화잖아요.”      


권인숙에 따르면 1980년대만 해도 11만 7천 명의 학생들이 학생운동 관계로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그만두었다. 물론 대다수의 퇴학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그들의 졸업장을 취득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동 운동이란 이름으로 소비해 버린 그들의 인생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자신의 상처와 희생에 대한 상처에 대한 보상 심리를 안고 살아왔을 것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운동가들에서 일종의 보상 심리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과격한 시위를 마치고 학생회에 진을 친 학생들은 밤새 술을 마시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다. 그들은 새벽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으나 커피가 나오지 않자, 자판기를 발로 차고, 결국 부숴버렸다. 그들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잠시나마 학생운동의 순수성에 회의를 가져본 기억이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엘리트 의식과 사상적 우월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사회적 토론의 논점이 된 바 있다. 결국, 진보 자신의 차별 의식이 한국 사회의 뉴라이트 운동을 촉발했으며, 진보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임지현 교수가 서문에서 말한 ‘도덕적 폭력’과 ‘일상적 파시즘’ 역시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암묵적 연상 테스트 (Implicit Associations Test. IAT)를 통해 무의식 속에 깊이 묻혀있는 성향을 분석해 내곤 한다. 이 Test 방법에 대해서는 대니얼 리처드슨은 ‘심리학자들이 알려주지 않은 마음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인종적 연관성에 관한 테스트의 경우, 연습 세션에서 어떤 사진의 얼굴을 백인으로 분류하려면 정해진 키를 하나 누르고, 흑인으로 분류하려면 다른 키를 눌러야 한다. 그다음에는 단어를 분류하는데, 단어가 긍정적(‘행복’, ‘웃음’)이면 특정한 키를 누르고, 부정적(‘분노’, ‘역겨움’)이면 다른 키를 누른다. 단어 분류 연습을 마친 다음에는, 무작위로 화면에 표시되는 그림과 단어를 분류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이 작업을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사용하는 키가 바뀐다. 긍정적인 단어가 나오면 아까 부정적인 단어가 나왔을 때 눌렀던 키를 사용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한다.”      


이 테스트를 수행한 사람들의 선택적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응답 속도이다. 긍정적인 단어와 백인의 얼굴을 하나의 키로 분류했을 때의 반응 속도와 그 반대의 반응 속도를 측정하여 측정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인종 차별적 경향을 읽어내는 것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암묵적 연상 테스트를 꺼내 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모두 파시즘을 비판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파시즘이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다는,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대기업 노동조합

“촛불을 들고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노동 존중 사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이 정부가 딱 그런 모습이다.” 지난해 11월 21일 오후 3시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 민주노동조합 총 연맹(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엄미경 부위원장이 한 말이다.     


그날 거리에 나선 조합원들은 ‘노동법 전면 개정’ ‘노동 사법 적폐 청산’ 등이 쓰인 팻말을 흔들며 “탄력근로제 저지하자”라는 구호를 외쳤다. 주최 측은 1만여 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위 현장에 모인 파업 근로자의 85%가 현대-기아 자동차 조합원이었다는 사실이 일부 보수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또 보수 언론의 편파적 기사”라고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복잡했다.      


탄력근로제란 유연근무제의 일종으로, 근로기준법 51조에 근거를 둔 제도다. 특정일의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다른 날의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정 기간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 노동시간에 맞추는 방식이다. 2주 이내 또는 3개월 이내 단위 기간을 정해 운용할 수 있다. 탄력근로제를 적용하는 회사는 직원이 일하는 시간을 계산한다. 시간을 계산하는 기준은 나라마다 다른데, 우리나라의 기준은 2주다. 2주 동안 일한 시간이 104시간을 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또한, 회사와 직원이 함께 합의하여 최대 3개월까지 늘릴 수 있다.     


노동조합은 왜 탄력근무제를 반대하는가? 탄력근무제를 하면 '일주일에 52시간'보다 많이 일하는 기간이 생긴다. 탄력근로제에서는 일주일에 최대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정부안에 따르면 최악의 경우, 밤 11시에 퇴근하는 날이 3개월 동안 계속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최근 정부가 일주일에 52시간 이상을 초과해서 일할 수 없도록 만든 법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주장이다.     


두 번째로 돈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는 ‘일주일에 40시간’이 정규 근무 시간이다. 따라서 주 52시간 근무제는 정규 근무 시간 40시간에서 12시간을 더 일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12시간을 더 일하면 그만큼 돈도 더 받는다. 정해진 월급에 연장근로수당을 더 받는 것이다. 그런데 탄력근로제를 하는 회사에서는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일주일에 52시간보다 더 일해야 연장근로수당을 받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같은 시간을 일해도 52시간보다 적게 일한 기간은 수당을 못 받게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근무 시간과 돈의 복잡한 방정식’이 ‘노동 존중’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찾아보기 힘들다. 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오늘날 노동조합의 구호와 파업 활동에서 1980년대 구로공단 파업을 이끌었던 민주주의 가치와 인권 운동의 구호를 찾아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특히 오늘날 대기업 노동조합은 어느 정치 단체 못지않게 부패해졌고, 그 구호는 이기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얼마 전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제 더는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의 을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민노총이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2016년 2월. 한국의 대표적인 그룹의 계열사였던 모 화학회사의 주주총회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마지막 주주총회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그룹에 매각된 그 회사는 사명 변경, 새로운 이사·감사 선임 등이 주요 안건을 의결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매우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이날 총회를 마지막으로 회사를 떠나는 사장을 향해 노동조합원들이 “oo 사장님! 창조적 파트너십 실천에 감사드립니다! 노조는 '창조적 파트너십'으로 생산과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임직원 여러분, 노조는 임직원 고용 안정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oo 사장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우렁차게 외친 것이었다.     


물론 이 주주총회에 앞서서 회사의 홍보팀과 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전 기획이 있었다. 이벤트임에 틀림이 없었고, 언론 매체가 이에 반응했다. 주주총회장에서 노조가 외친 ‘창조적 파트너십’이란 것의 실체는 사실상 ‘사장과 노조 간의 부정한 거래’를 의미했다. oo 사장이 경영하던 기간 내내 이루어졌던 노조와 깨끗하지 못한 거래는 oo 사장이 떠난 자리에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마치 파시즘 이후의 세상과 같은 혼란과 쓸쓸함, 그리고 비난과 암묵적 보복, 그리고 너나 할 것 없는 패배주의였다.     


오늘날 대기업의 노동조합 문화는 철 지난 소위 좌파 파시즘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히틀러가 무솔리니를 만나듯, 잠재된 파시즘이 숨겨진 파시스트를 만나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스스로 파시즘적 DNA를 버리는 방법은 하나이다. 그들의 운동의 방향을 노동조합이 아닌 노동자 전체의 인권과 행복에 맞추어 조율하여야 한다. 자기 이익과 집단 정체성에 경도된 조직은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패는 은밀히 이루어지지만, 반드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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