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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15. 2019

‘인간의 본능’ 자신의 눈을 때리는 아이들

책 속의 사람들

인간의 본능 - 테네시 밀러

2018년에 출판된 이 책의 표지에는 ‘가톨릭 신자이자 진화론자인 케네스 밀러의 진화론 강좌’라는 선전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이 문구에서 ‘가톨릭 신자’라는 수식어가 ‘진화론’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케네스 밀러라는 이름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낡은 ‘기독교적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원천적 거부감에 기원을 둔 진화론에 대한 찬-반 논쟁과 그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라는 타이틀과 ‘진화론’이란 주제 간에 존재하는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임이 틀림없다. 이 책 역시도 그 지루함과 흥미로움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과 진화론을 대비시켜 놓은 표지의 문구는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다. 저자는 진화론을 설득하면서도 반 진화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물론 가톨릭 신자로서 그가 믿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만약 케네시 밀러가 믿는 신이 백악기에도 살아있었던 인격적인 신이라면 그가 말하는 진화론은 진흙으로 빚어진 아담의 몸에 혼을 불어넣은 ‘신의 입김’이 될 것이며, 스피노자가 말한 창조하는 자연이라면 그의 진화론은 자연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 추측해 본다면 그의 신은 후자에 가깝다. 책의 전반부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 반박하기 힘든 증거와 논리로 설득한 저자는 후반부에 가면서 반 진화론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거부감, 공포와 자존감에 대해 위로의 말을 전하려 한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이름을 달고, 2018년에 출판된 이 책의 첫 장을 열며 궁금했던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의식의 문제에 대한 최근의 해석이었다.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진화됐는지, 한편 이러한 질문에 대한 최근의 논쟁들은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설명을 기대했었다. 더불어 인간의 의식이 물질로부터 진화됐다고 하는 주장과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증거로서 내놓은 메커니즘에 대한 논쟁, 그 논쟁의 합의점과 차이점 등도 궁금한 것 중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자의 거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위의 첫 번째 궁금증, 즉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논쟁들에 대한 단순한 설명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두 번째 질문, 즉 ‘의식’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논리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설명만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이다. 그동안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과 사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매우 새롭게 잘 설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감동을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종교인은 확실히 우주를 보는 눈에 감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 케네시 밀러는 이 책에서 ‘눈을 때리는 아이들’이라는 제임스 디키의 시를 인용한다. 이 시는 제임스 디키가 이방인 아동 시설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 아동 시설에서는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이 자기 눈을 때리지 못하게 팔이 묶여 있었는데, 이는 아이들이 시각을 느껴보려고 자신의 눈을 반복적으로 때리는 것을 막기 위한 물리적 조치였다.      


“그들은 자기에게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머리가 긴 아홉 살짜리 아이/다시, 또다시 어두운 밝음의 환상으로 폭발하는 그 여자아이의 눈동자/팔을 묶기 전에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이 시에 눈길이 간 것은, 경험은 본질에서 주관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시각’과 ‘빛’ 만큼 좋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란 경험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연구 과정에서 개인적인 관점들을 솎아내고 남은 객관적 사실들만을 기초로 분석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의식’이란 자극과 경험에서 시작된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도 전자기파나 빛의 원리에 대해서 학습할 수 있고, 어느 파장이 눈에 보이고, 또 어느 파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를 인식할 수 있다. 즉,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빛의 본질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얀색, 빨간색, 초록색의 빛을 실제로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로 빛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반면 이해에는 경험과 함께 객관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의식’의 물질적 배경과 기능이라는 객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불이 눈에 들어와 망막의 감광 세포를 때렸을 때, 활성화되는 뇌세포를 찾아낸다면, 그 부분을 자극하여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세상의 빛깔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감각의 문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감각은 경험의 토대이고, 경험은 이해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네이글의 주장을 들어 좀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네이글은 ”어떤 생명체가 의식이 있다는 것은 그 생명체로써 존재하는 체험, 그 생명체로써 존재하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다른 감각을 가진 타자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네이글의 주장에 따르면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자기가 거대한 곤충이 되어 있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꿈속의 나비와 실재의 자신이 구분되지 않는 감각에 대한 장자의 이야기도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네이글과는 다르게 물리학과 화학으로 장엄한 일몰, 무지개의 화려한 색깔, 눈송이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진전시켜, 진화론에 제기되는 고전적인 문제 중 하나, 즉 의식을 비롯한 정신적 활동이 어떻게 물질을 기반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식 그 자체는 분자나 세포의 속성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물질에는 생명이 없지만, 그 물질들의 작용으로부터 생명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를 데이터 스트림으로 설명한다.      


”데이터 스트림은 거의 동일해 보이는데 어째서 어떤 것은 대화를 실어 나르고, 어떤 것은 문자 메시지를 실어 나르고, 어떤 것은 사진을 실어 나르고, 어떤 것은 이런 신호들을 수신하는 바로 그 장치를 새로운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암호화된 명령을 실어 나를까? “      


데이터와 데이터의 작용이 다르듯이 물질과 물질의 작용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한 위의 논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자도 이러한 의심을 인지하고 있는 듯이 데이터 스트림의 경우는 “수신장치의 구조 때문이다.”라고 한발 뒤로 물러난다. 그러나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프로그래머들이 데이터 스트림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과 같이 신경과학자들도 신경 활동에 관해 설명해 낼 것이라고 막연한 희망 사항을 전한다.     


물론 이러한 희망 사항만으로 물질이 어떻게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의 작동으로 의식이 생겨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이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된 것이 없다. 저자는 두 번째 도전으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물리적 우연의 결과가 자연선택을 통해서 생명체로 탄생하고, 그 생명체의 의식의 내용과 수준이 단순한 생존 기계의 수준을 넘어설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도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생존만을 위해 미세하게 조정된 자동 반응 메커니즘은 대단히 특화된 상황에서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그 유연성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복잡한 환경과 조건에 적응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사자나 호랑이, 또는 다른 인간과 맞서 싸워 생존하기 위한 환경에 맞게 진화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다원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도화된 생체 메커니즘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교통이 정체되는 도로를 운전하면서 차선을 변경하고, 다른 차들을 피해 다니고, 예상치 못할 상황에 반응하면서 자동차의 기어를 조작할 때 얼마나 많은 정보가 처리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분명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진화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의 유연한 속성 덕분에 거의 모든 사람이 자동차 운전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런 저자의 주장에는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알 수 없는 미래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생체 메커니즘이 선행 진화되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예언자적 목적을 가진 일종의 준비 과정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한편 저자의 주장대로 인간이 현대와 같은 고도의 목적을 위해 진화되진 않았지만, 진화의 덕분에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의 유연성이 필요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화론 자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더구나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유전자가 이기적 유전자로 환원될 필요도 없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의문은 ‘세포가 모여 정신이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더욱 깊어진다. 그는 스물다섯 개나 서른 개의 기호를 단순히 일렬로 이어 붙여서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나 시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진화의 복잡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복잡성이 단순성으로부터 등장한다는 개념은 사실 자연과 생명에서 되풀이되는 주제다. 소리가 음악을 만들고, 단어들이 문학을, 세포가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신경 충동은 그 자체로는 분명 음표 하나, 글자 하나, 세포 하나와 비슷하다. 그 자체로는 분명 음표 하나, 글자 하나, 세포 하나와 비슷하다. 그 자체만으로는 현실의 깊이를 포착하거나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아 놓으면 세상 그 자체만큼이나 풍부하고 미묘한 의미를 담은 화려한 융단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주장을 배경으로 저자는 중요한 것은 “의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파벳이 중요하다는 뜻인가? 알파벳 하나하나에 햄릿이 되기 위한 내적 충동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주장처럼 알파벳을 길거리에 던졌을 때, 그것이 자동으로 맞추어져 셰익스피어의 전집이 탄생했다는 말인가?      


단어를 모아 소설을 쓰고, 음표를 모아 음악을 작곡하는 데에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목적과 의도와 기술이 존재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것은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연선택에는 목적과 의도가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적응과 돌연변이만이 진화를 추동하는 힘이고, 단어와 음표에는 그런 힘이 없다.


‘의식’의 문제를 불충분한 논리로 마무리한 저자는 이어서 “우리가 잘못했다고 비난받거나 잘했다고 칭찬받는 것들은 어떤 비물질적인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라 물리적 필요에 의한 결과물이다”라고 주장했던 로버트 라이트의 말을 시작으로, ‘자유의지’의 문제를 꺼낸다. 그리고 자유의지는 진화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환상일 뿐이라는 결정론자들의 주장을 하나씩 인용해 나간다.      


“저는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의미의 자유의지 같은 것은 믿지 않습니다. 영혼이 어떻게든 TV 화면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고, 단추를 누르고, 행동 레버를 당긴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저자가 인용한 스티븐 핑커의 이 말은 일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의 유령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다음과 같은 해머로프와 피터 울릭 채의 이론 체계를 도입하여 그 진위를 따진다.     


첫 번째는 해머로프의 일명 ‘미세소관’ 이론인데, ‘신경세포들 사이의 양자 컴퓨팅’, 즉 객관적 환원의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한다. 이 이론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의 사건이 시간을 거슬러 시스템의 현재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의 행동이 뇌 자체의 상태를 결정할 수 있다는 다소 어려운 주장이다.      


두 번째는 채가 주장하는 이론으로, 뇌는 시냅스에 의해 지배되므로 신경 네트워크의 상태는 신경 세포들의 패턴보다는 그 시냅스들의 상태를 특정할 때 더 잘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경 활동 자체가 뇌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생각이 의사 결정을 관장하는 우리의 뇌의 상태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역시 채의 이론이다. 그는 임의의 순간에 뇌가 그 시점의 신경 네트워크와 신경계의 주체적인 조건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행동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는 신경세포의 활동은 미래의 행동을 일으킬 네트워크의 특징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저자 케네스 밀러는 채의 이러한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평가한다. “우리 뇌는 기준을 설정한 후에 내적으로 사건들을 재생해보고, 최고의 옵션을 선택한 다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라는 채의 말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한다. 결론을 유보하는 대신에 한 가지 다른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은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 역시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루한 진화론에 대한 설명과 반 진화론자들에 대한 반박, 해결되지 못한 의식의 토대와 자유의지의 존재 규명,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진화론적 논쟁 들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해가던 저자는 마지막 장, ‘중앙무대에 선 인류’에서 빛나는 어록을 담아낸다. 케네스 밀러는 매우 품위 있고, 신중하며, 논리적인 화법으로 자신의 진화론을 펼쳐놓고는 그 위에 인간을 살포시 얹어 놓았다.     


“모든 생명체 중에, 이 작은 행성의 표면을 빛낸 생명의 모든 형태 중에 이런 식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는 생명체는 단 하나밖에 없다. 오직 한 종의 생명만이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장관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천박하고 극단적인 다윈주의자들의 암울한 다윈주의와는 달리 저자의 언어는 세계 속에서 유전적 변이의 예측 불가능함과 자연선택의 요구들 사이에 놓인 긴장감을 극적이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그것은 진화가 부여해주는 재능에는 무자비한 탐욕과 공격성은 넘쳐나지만, 사랑과 친절, 미덕 등은 빠져 있기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자”라고 이야기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경박한 주장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과 가장 닮은 창조물 (또는 진화물)은 예술이다. 그리고 예술 역시 일종의 진화적 산물이라는 데니스 더턴의 주장에 대해, 그림, 음악을 포함한 영역에서 진화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예술의 현상이 있음을 들어 반박하는 다양한 의견을 소개한다. 그리고 결국 다음과 같은 말로 인간의 의식과 생명이 만들어 낸 예술품들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진화생물학은 인문학을 대신하지도, 인간 사회의 예술적 문화적 성취를 살아남아 번식하려는 전략이 남긴 부산물로 깎아내리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바흐의 푸가, 예이츠의 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살바도르 달리의 미술 작품, 그리고 괴델, 라마누잔, 앨런 튜링의 수학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생명체다.”     


물론 케네스 밀러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화가 만들어 낸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관점을 바꾸지는 않는다. 신은 물질을 창조했고, 진화는 인간 정신을 만들어냈으며, 인간 정신은 예술과 과학을 만들어 낸 것이라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를 묻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성급하게 말한 유발 하라리와는 다르게, 저자는 인간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생명체임을 다음과 같이 근사한 말로 표현한다.      


“의미는 물질이나 에너지에 내재된 속성이 아니다. 탄소 원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탄소 원자는 그 무엇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고,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고, 목적도 없다. 탄소 원자는 탄소 원자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 개인의 의식적 성찰과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구의 자식이지만 그 이상이기도 한 우리는, 우리를 우주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몰아세우거나 우주 역사의 가장자리에 초라한 존재로 표현하는 그 모든 결론에 저항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의미는 우리 자신의 몫이다.      


저자가 고백했듯이 자연사와 진화에 목적이나 방향성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느끼고 있는 생명 그 자체는 유전적, 생물학적, 문화적 유산이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귀하고, 따라서 진화는 아담의 죽음이 아니라 아담의 승리를 말해준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신은 존재하는가?”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과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신념 체계를 동원해도 이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 결국은 믿음으로 남을 뿐이다.     


“인간의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역시나 지적 논란이 분분하다. 저자 역시도 그저 ”진화의 산물“일 것이라는 주관적 신념만 남겼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성 역시도 허무할 뿐이다. 그러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인간만큼 빛나는 존재는 없다. 인간은 유일한 종이고, 대체 불가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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