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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리콜라주 Jan 27. 2021

조선인이 쓰는 조선 이야기 (8)

중소조선소의 몰락, 그 뒷이야기 - Part2

(전편에 이어)


'중소 조선소 몰락'의 또 하나의 방아쇠인 ‘RG’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RG가 무엇인지부터 설명드리지요.

선박은 '주문 생산 계약'을 통해 약 2~2.5년에 걸친 설계-생산 과정을 거쳐 고객에게 인도됩니다. 그런데 제조 업체인 조선소는 자재 대금과 설계 및 생산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까요? 비용이 막대하여 자체적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우므로 선주가 배의 총 구매 가격을 조선소에 적절한 시점에 분할해서 지급하도록 계약을 합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계약금으로 보통 10%~20%, 건조 기간 중에는 주요 생산 절점(Key Event)에 2~3회로 나누어 60%~70%, 마지막 배를 인도받을 때 10~20% 정도를 내는 형태입니다. 물론 불황일 때는 선주의 입김이 세져 마지막 인도금의 비중을 극도로 높이는 Heavy-tail 계약이 성행하기도 합니다. 

선주는 주문한 배를 인도받기도 전에 이렇게 상당한 규모의 대금을 조선소에 선 지급 해야하는데, 조선소가 그 사이에 망하기라도 하면 그 큰 돈을 소위 '떼어먹게' 되는 위험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RG (Refund Guarantee : 선수금 환급 보증)'입니다. 조선소가 계약서에 있는 분할금을 '선지급' 받으려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은행에서 해당 금액만큼의 환급을 보장하는 'RG'를 받아 선주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RG에는 '조선소가 문제가 생겨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면 은행은 즉시 선주가 선지급한 분할금을 이자를 포함하여 선주에게 즉시 반환한다'라는 보증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은행은 RG 발급의 대가로 조선소로부터 보장 금액의 약 1% 정도가 되는 수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해당 선박에 대한 선순위 담보를 확보합니다. 그래서 선박 건조 계약은 선주와 조선소 양자 간의 계약이라기보다는 선주, 조선소, RG은행 3자간의 계약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합니다. 또한 선박 계약의 '진짜 발효' 여부는 선박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때가 아니라 바로 'RG가 선주에게 발급되어 계약금이 조선소에 들어오는 때'라는 것이 조선 업계의 알려진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이 RG가 어떻게 한국의 중소 조선소를 몰살시키는 방아쇠가 되었을까요? 그 얘기를 하기 전에 경쟁국인 중국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은 '연안 개발 전략'과 공업화 및 도시화 추진을 위한 '농민공 양성 정책'을 기반으로 한 때 조선소가 약 3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조선 산업에 집중 투자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수퍼사이클 이후 가파른 내리막, 그로 인한 불황의 파고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을 동시에 덮쳤습니다. 그 결과로 중국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구조조정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그나마 제대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조선소가 약 50여 개, 그중 경쟁력을 갖췄다 평가되는 조선소는 약 20여 개 수준으로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한국과 달리 중국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되어 실행되었습니다.

중국의 조선소는 국영과 민영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국은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민영 조선소들을 우선 정리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였냐고요? 간단합니다. 중국 정부는 블랙리스트의 반대 의미인 ‘화이트리스트’라는 것을 만들어 제한적인 금융 지원을 시행하였습니다. 즉, ‘RG를 통제'하였습니다. 각 민영 조선소들을 재무적, 사업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조선소들은 국영 조선소들과 함께 ‘화이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주었습니다. 판단은 정부가 하고 금융권은 지침대로 이행을 하였습니다. 경쟁력이 없는 민영 조선소들은 이렇게 ‘질서 있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경쟁력 있는 민영조선소들은 극심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재정 지원 및 RG가 보장되는 조선소' 임을 세계 시장에 알리며 생존 및 발전을 지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2014년 가을 최초로 발표된 중국 조선소 화이트 리스트 관련 기사 (출처: 로이터 통신)

국영 회사도 그대로 두지는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의 국영 기업은 '부도'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부실화된 국영 조선소는 아직 재정상태가 양호한 다른 국영 조선소, 또는 시너지가 나는 국영 해운, 에너지 회사와 합병을 시켰습니다. 조선 경기의 침체가 계속되자 국가는 이런 개별 조선소간의 합병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2019년에는 양대 국영 조선그룹인 CSSC과 CSIC를 합병함으로써 '더 이상 할 것이 없는 상태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중국은 조선 산업의 부실화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던 중국의 상업 은행'선박 리스금융 자회사'를 설립시킴으로써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은행들은 이제 조선소에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RG 금액을 선주에 물어주고 부실을 떠안을 수밖에 없 소극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문제 된 선박은 스스로 인수하여 '선주로서' 끝까지 건조를 완성을 시킵니다. 그리고 신조 혹은 리세일 시장에 적절한 타이밍에 정당한 가격을 받고 매각하여 은행에 손실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중국의 은행들은 이제 신조 시장에서도 자국의 조선소를 지원하는 막강한 해운 금융기관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의 '선박 리스금융 회사'가 전통적인 '유럽 선박 금융 기관'의 역할과 규모를 넘어서서 국제 해운 업계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2016년 당시 중국 선박 리스금융 회사의 부각을 기사화한 내용 (출처 : shippingherald.com)

우리는 어땠을까요? 아마도 시장이 한참 고꾸라져 어려움이 심화되고 있던 2010년대 중반이었을 겁니다.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중소 조선소들은 재정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키코로 생긴 빚과 지속된 불황 속에서 재무지표가 악화되고 현금 유동성에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경영난을 타개하고 자체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주'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중소 조선소의 주 거래 은행들에게 상급 금융 관리 기관으로부터의 공문이 접수됩니다.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전해 들은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중소 조선 업계의 부실이 심화되고 있으니 각 은행들은 대출 현황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문제 발생 소지가 있는 여신은 '고정 이하'의 등급으로 관리하라.” 

저는 이 공문의 내용 자체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융 감독기관에서 부실 징후가 보이는 산업군의 기업 여신을 철저히 관리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금융권의 동반 부실 리스크를 막자는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요청입니다. 그러나 그 공문 한 장이 결국 '한국 중소 조선소 전체’를 고사시키는 결정적 한방이 되었습니다.

수출입은행(좌), 일반은행(우) '고정 이하 여신비율 변화, 13년 급등하여 14년 최대치를 보인다. (출처: 기획재정부, 예금보험공사)

여신은 건전성 분류에 따라 정상, 요주의, 고정, 회수의문, 추정손실의 5단계로 관리됩니다. 정상과 요주의는 ‘정상 수준’의 여신을 말합니다. 고정은 '경계성 상태'로 3개월 이상 연체되고 채무상환능력의 저하 요인이 존재하는 여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회수의문과 추정손실은 ‘위험 수준’의 여신을 말합니다.

즉, '고정 이하'의 여신은 일단 '정상이 아닌 여신' 뜻입니다. 은행은 '고정 이하로 떨어진' 중소 조선소 여신에 대하여 상당 규모의 손실 충당금을 설정해야 했습니다. 은행의 손익이 급속도로 악화됩니다. 그 당시 "조선소들 때문에 올해 직원들 상여금이 다 날아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선박 대금과 같은 큰 금액을 보장하는 RG를 신규로 끊어 준다는 것은 여신 결재라인이나 심사역들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즉, '은행에 엄청난 손실 충당금을 추가로 쌓게하는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 조선소들에 대한 시중 은행의 RG가 막히게 됩니다.


그 당시 중소 조선소의 영업 담당자들은 선주나 브로커로부터 계속 이런 이메일이 시달립니다. "RG가 나올 수 있는 거야? 그게 확정이 돼야 발주를 할 수 있어." 심지어는 계약 직전까지 갔던 어떤 선주는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난 후 브로커를 통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이 프로젝트가 나한테는 엄청 중요한데, 우리 쪽 파이낸싱 은행에서 너희 조선소는 RG가 불확실하니까 중국 국영 조선소 쪽하고 계약하는 조건으로 바꾸자고 해서 그렇게 되었어..."

앞서 소개한 대로 중국은 살아야 할 조선소를 미리 정해 일부를 살리는 전략을 실행했습니다. 화이트리스트 정책이라는 매우 일방적이지만 투명한 제도를 통해 '이 조선소는 살아남을 조선소'라는 사인을 명확히 시장에 주었습니다. 그 당시 이런 원칙을 이해한 시장 수요자들은 화이트리스트에 있는 중국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중소형 조선소에 RG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수 차례 확인한 브로커 및 선주들은 사업 투자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중국의 '화이트리스트' 조선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렇게 몇 년, 한국 중소 조선소가 강점을 가지고 우위에 있던 중소형 탱커, 화학제품 운반선, 중소형 컨테이너선, 특수목적선 등의 시장이 하나하나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엄청난 '기회의 이동'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가 약 8년간 몸을 담았던 조선소도 그렇게 RG가 막힌 채, 외국 선주들과 이미 서명을 완료한 수십 건의 계약과 거기에 포함된 약 1000억 원가량의 계약금을 공중에 날리고, 현금 유동성 경색으로 신조시장에 뛰어든 지 약 10년 만에 조선 시장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습니다.


키코와 RG 모두 금융 관련 사안입니다. 그러나 오해를 없애기 위해 말씀드리면, 저는 “중소 조선소가 금융권 때문에 망했다”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금융권은 금융권 나름의 원칙과 제도 그리고 특성이 존재합니다. 어떤 경우에 조금 더 도와주지 않았다는 '섭섭함'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산업을 망쳤다는 원망은 과한 것입니다. 또한 그런 해석은 조선 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했던 은행들은 제도권 안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고 매 위기의 순간마다 조선소와 함께 해법을 찾고자 최선을 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금융권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금융 기관들이 회사를 항상 '서포트 해줄 수 있는 여건'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제조업을 하는 경영진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욕심'과 '무지' 그리고 '운' 등을 포함, 회사가 몰락하게 된 모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그 회사의 경영진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부분은 너무나 아쉬움이 많습니다. 왜 어떠한 정책적 판단이나 조정 없이, 한 산업의 운명을 그냥 금융권의 생리와 판단에 의해 그냥 '흘러가도록' 놔두었을까요? 적어도 세계의 1, 2위를 다투는 산업의 중소기업 전체에 해당하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종합적이고 선제적인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경쟁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도라도 한번 살펴보는 게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의 중소 조선소의 몰락은 뭐랄까... 마치 가축 전염병이 발병한 상황에서의 '살처분 조치' 같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는 실제 가축 전염병이 생기면 중수본을 세우고 각 지자체와 중앙정부, 관련 기관이 모두 공조하여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일을 처리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수출 제조업의 대표 업종 중의 하나인 조선 산업의 위기를 그 당시 그렇게 관리했다는 게 저는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제가 모르는 '합리적인 판단이 있었겠지...'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 현재! 그 때로부터 생존하여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중소 조선소가 정말 단 한 군데도 없다는 현실은 그 생각을 조용히 접게 만듭니다.

 

현재는 장기 불황의 영향으로 글로벌 조선 산업은 국가 간 경쟁의 모습으로 더더욱 변해가고 있는 양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별 업체의 경쟁력도 중요하지만 국가의 조선 산업에 대한 종합적이고 전략적인 정책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독자분들께서 꼭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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