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흐릿함에 대하여
p100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었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p101 그래서 소설을 쓰는 일은 일종의 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눈으로 그 일들을 바라보고자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모든 게 불확실해진다.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세계는 흐릿해진다. 여러 번 겪은 일이다. 이제 나는 그 흐릿함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손가락 끝으로 ‘blur’를 따라 써본다. 흐릿하다는 단어의 뜻처럼 확실하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b에서 점점 자기의 존재를 축소해 가는 듯한 l, 무언가를 담아보려는 u, 결국에는 자기를 증명하는 것에 실패하고 흐릿해지지만 무언가를 밖으로 흘러 보내는 듯한 r. ‘blur’ 단어의 뜻과 잘 어울리는 글자다.
어쩌면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불확실성만이 확실한 것은 아닐까?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흐릿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생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