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는 시간들
- 2019년 10월 17일의 시간
첫 풀코스 마라톤 경기가 3일 남았다.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집중할, 시간을 소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남들에게 그럴 듯 해 보일 어떤 것이. 그래서 내년 3월에 달려 볼까 했던 풀코스 마라톤을 신청했다. 신청하고 여름 내내 답답해 미칠 것 같고 그래서 술을 먹고 싶고 폭식을 하고 싶으면 달렸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내 안의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나면 그냥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 보냈다.
나도 안다. 나에게 마라톤 도전은 남들에게 어려워 보일 수도 있는 그럴듯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무언가를 외면하기 위해서 하는 일인 것을.
달리면서 내 안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독한 자기혐오, 자기 연민도 같이 사라지길. 그걸 긍정이나 자기 인정으로 채우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텅 비어 버리길. 비어 버렸으면 한다. 어떤 공간에서도 어색한 나, 어떤 사람과도 서걱거리는 것 같은 나, 호의를 베풀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나. 모든 것이 달리면서 에너지가 소모되듯이 사라지기를. 텅텅 비어 버린 나를 마주하기를.
웃기다. 자기혐오와 자기 과시, 나르시시즘은 평행선처럼 같이 간다.
존재하고 싶지 않다. 없어지고 싶다. 아니 진심은 존재하고 싶다. 없어지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좋겠다. 나를 안아 주면 좋겠다. 누군가의 온기가. 온기가 필요하다. 온기가 너무 필요한 나여서, 누구의 온기에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사람에게 무너지듯 내 감정을 던지고 말 것 같아서, 관계 맺기도 두렵다. 그냥 혼자 달리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나도 나를 온전히, 꾸미지 않고. 표현하고 싶다. 언어화하고 싶다. 아니 내가 꾸미고 싶은 나로 언어화 한 나를, 그런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수도.
풀코스 마라톤 이후로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대면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풀지 않은 실타래는 그대로 엉켜 있을 것이다.
마라톤이 끝나고 4일이 지나면 그와 이혼 판결일이다. 이혼을 하고 나면 나를 언어화할 수 있을까? 아직도 그가 이혼해주지 않을까 봐, 또 어떤 트집을 잡아서 이혼을 연기할까봐 두렵다. 그래서 글을 쓸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냥 20대 초반에 잠깐 사귄 남자로 남았다면 그를 아름답게 기억할까?
그와의 일을 복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여자로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자로 거부당했던 여자로의 자아가 자꾸 뛰어나와, 그가 아닌 다른 이에게라도 여자로, 남성의 성애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당신이 사랑해주지 않은 여자지만, 아직 다른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런 생각의 연쇄를 이어가다가도 아직도 남자의 사랑과 인정에 나의 가치를, 그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나의 습, 페미니즘을 접하고 여성이 어떻게 남성에게 성적 대상화가 되고, 그 대상화가 될 때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그 진부하고 슬픈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 아직도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픈 내가 안타깝다.
나이가 많아지고 외모가 더 이상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이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평가, 운동, 채식, 그리고 꾸밈 노동.
이런 것들은 다 놓아 버린다면. 내 일상은 무너져 내리고 나도 무너질까? 그런 것들로 일상을 지탱하는 나도 같이 무너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