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찾아온 그녀

by 실배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대학원 2학기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교 곳곳에 봄꽃들이 만발했다.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계단을 올라가던 중 누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학원 선배 민주였다. 선배지만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이어서 평소 친하게 지냈다. 민주 옆에는 하늘하늘한 분홍색 치마에 노란 카디건을 걸친 그녀가 있었다. 환한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봄바람이 불어왔다. 민주는 나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대학 때부터 친한 친구 사이인데 이번에 대학원 신입생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녀가 나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바보처럼 덜컹댔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꽃들 사이로 하늘하늘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은 각인되어 떠날 줄 몰랐다. 저녁 내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다 얼마 전 민주가 나에게 싸이월드 일촌 신청한 생각이 떠올랐다. 컴퓨터를 켜고 민주의 미니 홈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 속에 그녀는 늘 웃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이다 민망함이 찾아왔다. 그냥 가기 뭐해서 형식적인 인사말만 남겨놓고 서둘러 나왔다. 그저 스치듯 한번 보았을 뿐인데 뭐 하는 건지. 그날은 밤이 낮으로 변한 듯 내내 깨어있었다.

나는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 사회를 맡게 되었다. 환영회 장소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펜션이었다. 1시간 남짓의 행사를 끌고 가야 했기에 부담되었다. 대본도 쓰고 연습도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연단 맨 앞에 서서 준비한 멘트를 주고받았다. 눈앞에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왠지 그녀도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보였다. 신입생의 장기자랑을 끝으로 식이 모두 끝났다. 재학생은 지도 교수님 중심으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소주 몇 잔에도 취기가 올라왔다. 잠시 술을 깰 겸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었다. 어둑한 하늘 너머로 봄꽃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찬 바람은 내 몸 곳곳 스며들었고,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방에 다시 들어가니 술을 먹는지, 술이 먹는지 모를 만큼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곳곳에 거대한 웃음이 달처럼 차올랐다. 널브러진 술병 사이를 가로질러 목적지로 향하는 순간 그녀가 보였다. 민주를 포함해 신입생 여럿이 모여 있었다. 갈등할 기회도 주지 않은 체 이미 발은 그곳으로 향했다. 일부러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색할 틈도 없이 신입생 특유의 밝음에 젖어들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샌가 사람이 떠나고 채워지며 그녀는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불그스름한 뺨만 바라볼 뿐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민주와 나, 그녀는 자주 어울렸다. 함께 식사도 하고 가끔 술도 마셨다. 신기하게도 그녀와는 자주 마주칠 일이 생겼다. 그녀는 내가 학부 조교를 하고 있던 회계학과 바로 옆 경영학과의 조교가 되었다. 가끔 쉴 때 사무실 앞 벤치에서 캔커피를 함께 마셨다. 자연스레 둘만 있을 시간이 많아졌다. 알고 보니 사는 곳도 근처였다. 심지어 그녀의 사촌오빠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이건 운명일까.

그녀는 멋지고, 세련되었다. 옷도 잘 입었다. 한 톤 높은 웃음소리는 매력적이었다. 그 소리가 듣고 싶어 일부러 실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면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를 만날수록 마음은 풍선처럼 점점 커졌다. 애써 그 마음을 감추려 노력했다. 내 현실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대학원생에게 연애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긴 그녀 마음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 없음에 그 탓을 돌렸는지도.

그날은 오전에 학부생이 치른 쪽지 시험 채점을 마치고 조금 늦은 시간 사무실을 나왔다. 옆 사무실에도 불이 꺼지는 것이 보였다. 이내 그녀가 나타났다. 퇴근하냐는 나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을 했다. 둘의 발길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녀와 나는 같은 버스를 탔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나란히 앉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와 다른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우리 사이에 흘렀다. 이제 곧 그녀는 내릴 때가 다가왔다. 내 심장은 점점 쿵쾅거렸다. 무슨 용기가 났을까. 이제 일어설 준비하는 그녀에게 술 한잔하자고 했다.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술집에 들어섰다. 그녀는 익숙하게 구석 창가로 자리 잡았다. 창가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바람에 내 열기를 식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안주도 없이 각자 병맥주를 시켰다. 나는 중심을 벗어난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바보 같은 놈. 헛된 시간만 재깍재깍 흘렀다. 그녀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이미 아는 듯 보였다. 순간 그녀 얼굴에서 그늘이 비쳤다. 그녀 같지 않은 낮은 톤으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최근에 3년간 사귀었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힘든 연애였다고 했다. 아직 감정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보였다고 했다.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겠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힘들었다고 했다. 그녀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녀 손에 내 손을 포갰다. 그리곤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다가가 폭 안았다. 가녀린 어깨 사이로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술집을 나와 그녀를 바래다주러 길을 나서는데, 그녀의 왼팔이 내 오른팔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을 부여잡고 그녀의 속도에 나의 발을 지긋이 맞추었다. 그녀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뒤로한 채 한참을 머물렀다. 달빛이 환히 비추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가 보였다. 헐렁한 티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으로 식탁 의자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잘 다녀왔냐고 익숙한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는 채 떼지 못한 하루의 노곤함이 붙어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녀는 둘째와 방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막,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왜 그래 하며 나를 밀어내는 손과 달리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지울 수 없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만난 그 미소 그대로였다. 그녀가 사라진 문 뒤에 서서 잠시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홀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