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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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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un 07. 2020

삼겹살에 소주가 생각나는 사람

내가 글 쓰는 공간에서 카테고리 중 하나는 '사람 냄새'이다. 세 가지 카테고리 중에 두 가지는 금방 정했다. 남은 하나는 고심하다가 내 글의 방향성에 내어 주었다. 소소하지만 따듯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실상 담고 보니 슬프고 지질한 이야기가 많은지 모르겠다. 하긴 그것도 삶의 한 부문이니깐.     


실상 나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한다. 어릴 때 비염이 심해서 결국 오른쪽 코가 막혀버렸다. 장점은 구린내를 잘 맡지 못한다는 것, 단점은 향긋한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도 잘 맡는 냄새가 있다. 사람 냄새이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내 안에 어떤 스위치가 있어서 그 사람에게만 가까이 가면 작동해서 뇌에 호감을 잔뜩 전달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여러 증상이 발현된다. 말이 많아진다. 웃음소리가 커진다. 자꾸 오래 같이 있고 싶어 진다. 특히 삼겹살에 소주가 생각난다.

      

대학원 시절 그 선배를 만났다. 각지고 커다란 얼굴에, 그 당시 30대 초반임에도 성숙미가 넘쳤다. 처음 보았을 때 조교수인 줄 알고 90도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이라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었다. 상담 전공 특성상 소수인 남자들은 금방 알아보고 뭉쳤다. 그 시절 우리는 학업, 연애, 불투명한 미래로 한데 묶였다. 우리 중 그 선배는 유독 바다 같은 존재였다. 가끔 지나다가 만나면 큼직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잘 지내지"라며 안부를 챙겼다.

      

그날은 유독 마음이 땅속 깊이까지 가라앉은 날이었다. 자기 분석을 통해 반복되는 나의 문제를 확인하고 좌절했다. 축 처진 어깨를 간신히 부여잡고 이제 막 정문을 통과하려는 순간,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가득 품은 선배였다. 가까이에서 구겨진 내 얼굴을 발견한 선배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나를 푹 안아주었다. 덜컥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세상 어떤 말로도 담을 수 없는 위로였다. 선배는 바쁜 일이 있음에도 술집에 함께 가주었다. 별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만 들었다. 그날이 힘이 되어 남은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세상의 많은 날 중 내 서랍 속에 곱게 간직해서 힘들 때 꺼내 보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뒤로도 주변의 따듯한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고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대학 때 동기로 만나,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든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친구 정주, 첫 직장에서 어려운 순간마다 타 부서였지만, 그때마다 옥상에 불러 힘을 주었던 준하 샘, 공직에 들어와 항상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셨고,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몸소 보여주셨던 변남섭 과장님, 중년에 제2 사춘기를 만나 방황할 때, 책과 독서 모임의 세계로 인도해주신 하나의 책 원하나 대표님, 글쓰기라는 기쁨을 알게 해 준 자상한 시간 박경애 작가님 등 그들이 뿜어내는 사람 냄새는 켜켜이 쌓였다.

     

이제 나에게 사람 냄새 가득한 곳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SNS이다. 작년부터 온라인 매일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1년 넘게 함께 글 쓰고 소통하는 글 벗이 생겼다. 오롯이 글로만 소통하고도 이제 막 지은 밥에서 나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새로운 근무지로 다시 발령 난 후 내 삶은 피폐해졌다. 처음 접한 예산 업무는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과 쏟아지는 연락으로 유체 이탈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경직된 사무실 분위기였다. 다들 일에 치여 말 한마디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사람 냄새가 그리웠다. 그 퍽퍽한 삶은 고스란히 매일 글에 담겼다. 나는 유머 가득한 밝은 글을 쓰고 싶었다. 내 글임에도 쳐다보기 싫었다. 그런데도 글 벗들은 찾아와 정성스레 댓글을 달아주었다. 까맣게 변한 밤,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앉아 읽어 보았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모두 핸드폰 화면을 넘어 내 마음에 고이 안 착했다.


그간 받기만 했으니, 이제는 나도 돌려주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이럴 땐 나의 작은 마음이 몹시 원망스럽다. 그래도 노력하면 될 거야. 열심히 주변을 살피고, 따듯한 말이라도 건네 보아야지. 대서양은 불가능해도, 한강 정도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힘을 받고 있으니 매일매일 1cm라도 넓혀가야겠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면서 진한 삶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힘든 글을 만나면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 냄새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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