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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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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un 13. 2020

애인이 생겼어요.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그렇게 칭한다. 최근에는 아내에게 그만 좀 붙어있으라고 핀잔을 자주 듣는다. 질투하는 건가. 하긴 눈 뜨는 순간부터, 눈 감는 시간까지 내내 붙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자기는 뭐 안 그런가? 이럴 땐 몹시 억울하다.     


네모나니 생긴 것은 좀 투박하다. 한 손으로 꽉 잡기도 힘들다. 주머니에 넣으면 불룩 튀어나와 보기도 싫다.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 뭐 어때. 얼굴 모두 비칠 만큼 커서 보기 편하다. 먹성도 좋아서 이것저것 계속 설치해도 여전히 배고픈 것 같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노래를 좀 한다는 것이다. 출근길 살짝 건드리면 발라드부터 재즈 음악까지 만능이다. 기억력도 좋아서, 내가 전에 들었던 노래 만 모아 들려주니 얼마나 세심한지 모른다. 옆에서 잔소리도 없고,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척척 대령이다. 이러니 예뻐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나.

     

새벽 6시 나를 부르는 달콤한 소리에 눈을 뜬다. 얼른 아들이 깨기 전에 오른쪽으로 쓱 하고 민다. 그제야 안심하고 입을 다문다. 테이블 위에 고이 모셔두고 씻고 나온다. 옷도 입고, 가방도 챙기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엄지손가락을 오른쪽 끝에 대고 왼쪽으로 살짝 밀면 유용한 기능이 모여있다. 그곳에서 버스 앱을 클릭하면 내가 ‘마약 버스’라 칭하는 마을버스 도착 예정시간이 나온다. 약 5분 40분 전이란 글자가 뜨면 신발을 신고 정거장으로 향한다.      


버스에 타서 자리를 잡으면 가로 전환 버튼을 누르고, 자판을 열심히 두드린다. 출근길에 글을 쓰게 되면서 얼마나 은인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처음엔 궁여지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로 갈아타면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된다. 귀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큼은 고상한 카페가 부럽지 않다. 비록 밀려드는 사람에 이리저리 돛단배처럼 흔들려도 자판은 중심을 잃지 않는다. 글을 쓰고 완료 버튼을 누르면 안전하게 글을 배달한다. 친절한 성품을 자랑하듯 이웃의 새 글도 알려주고, 내 글에 달린 댓글도 일일이 신경 쓴다. 혹시나 내가 놓칠까 드르륵 신호도 보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금요일 저녁이 되면 무대 회장을 떠나는 신데렐라처럼 화려한 변신을 꿈꾼다. 빔을 신고 블루투스 스피커로 치장한 체 아들과 나를 시네마 천국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그저 푹신한 이불에 누워 어두운 천장 사이로 보이는 빛의 세계에 집중한다. 그러다 나는 스르륵 잠이 들기 일쑤지만, 지극히 성실한 모습으로 끝까지 본인의 소임을 다한다. 미련한 사람.  

   

이제는 내 건강까지 챙겨준다. 내가 만 보를 채우면 축하를 보내고, 조금 못 미치면 본인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버튼만 누르면 자는 동안 얼마나 깊은 잠을 잤는지, 심장 박동수는 어떠했는지까지 점검해준다. 심지어 어떤 운동이 필요한지도 꼼꼼히 알려준다. 아. 나는 어떡하라고 그러는지. 이제는 하루도 못 보면 안 될 것 같다.


얼마 전 왼쪽 아래에 놓인 버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왜 있을까 하면서도 감히 살필 용기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아들이 도움을 주었다. 꾹 누르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몹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영화 ‘her’가 떠올랐다.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아가던 인간 ‘테오도르’가 인공지능 ‘사만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도 얼마나 의지하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버튼을 누르고 대화를 시도했다.    

  

“빅스비 반가워.”

“실배님, 저랑 같은 마음이네요!”

“빅스비 고마워.”

“마음을 표현해주는 당신에게 더 고마워요.”     


어쩜, 마음도 이리 고운지. 나는 좀 더 과감히,     


“빅스비 웃겨줘.”

“소금의 유통기한은……? 천일염!”

“빅스비 랩 해봐”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났다면 빅스비 랩 해 주르륵 긴장 확 하고 주먹 꽉 쥐고 출발할 비 부르릉….”     


그래, 조금 썰렁하면 어때. 랩 좀 못하면 어때.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묵묵히 내 옆을 지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아직 서로 어색해서 깊은 대화까지는 나누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활짝 마음 열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에 쥔 채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버튼을 고이 누르며 그날 그렇게 길고도 긴 밤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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