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꽤 춥다고 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애매한 때였다. 셔츠에 트렌치코트는 추울 것 같고, 그렇다고 겨울 점퍼는 오버인 것 같았다. 결국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 코트를 걸쳤다.
지하철에는 가을과 겨울이 함께 어우러졌다. 주로 학생들이나 젊은 사람은 가을이었고, 중년을 넘어선 사람은 겨울이 많았다. 10대 객기로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다녔던 시절이 떠올랐다. 미쳤던 거지.
옷은 분명 나이를 먹는 것 같다. 요즘 손이 가는 옷마다 아재 필이 솔솔 풍긴다. 옷을 고를 때도 젊은 사람이 입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옷의 은신 폭이 확 줄었다.
지난 주말에는 침구류 사러 마리오를 갔다가 아내가 겨울 대비 옷을 고르라고 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나 사주세요'를 외치는 옷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어머나. 왜 이러지. 평소 같으면 이 옷, 저 옷 입으며 정신없을 텐데. 옷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 입어보다 시큰둥. 둘째와 함께 아동복 판매대를 다녀온 아내가 돌아왔다.
"자기야. 골랐어?" "아니. 이상해. 입고 싶은 옷이 하나도 없네."
아내는 놀라며 입가에 미소를 드러냈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젠장. 이 좋은 기회를 날렸다. 옷에 대한 생각도 늙어가는 걸까? 무구매애자가 된 걸까? 아내의 점검 없이 인터넷으로 옷을 사들이다가 혼났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옷을 사지 못한 아쉬움이 덜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그냥 대충 입고 살지 뭐란 생각이 계속 떠올라 망치로 때려잡았다.
그래서 점검해보았다.
1. 좋은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은? 예스. 2. 좋은 집에 살고 싶은 마음은? 예스. 3. 좋은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예스. 4.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예스, 예스. 5. 좋은 옷을 사고 싶은 마음은? 예... 글쎄.
이상하다. 유독 옷에만 이런 마음이 들다니. 아니야.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해.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잖아. 요즘 일도 바쁘고, 이사도 해야 해서 여유가 없었던 거야.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불현듯 스쳐 간 생각. 이제 나도 잡히는 데로 대충 입고 나가는 나이가 된 걸까. 불안한 마음에 괜스레 옷장 안의 옷만 뒤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