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품 없이 살기 불가능한 것처럼

미션 실패다.

by 실배

미국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한 달간 중국 제품 없이 살기에 도전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주일 정도는 잘 버텼으나 결국 이주 차에 견디지 못하고 실패했다. 눈꺼풀이 한없이 내려앉는 침대에 누워 생뚱맞게 그 생각이 왜 떠올랐을까. 원인은 첫째에게 있었다. 이제 막 사춘기의 터널에 진입해서 온갖 악행을 도맡고 있다. 조금이라도 잔소리할라치면 눈엔 헤드라이트, 입엔 모터를 달고 반격한다. 요즘 재택근무를 다시 하면서 주 2회는 첫째와 종일 같이 있다. 평화의 시기도 잠시, 이내 가정 대전이 발발한다. 그래서 내일 하루만이라도 잔소리 없이 지내보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잘할 수 있겠지.


아침에 눈을 뜨니 아내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슴 안에 한가득 과제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선 오전 8시 40분에는 둘을 깨워 아침을 챙겨 주어야 했다. 그리곤 곧바로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째는 노트북으로, 둘째는 패드를 대령해야 한다. 다시 점심을 먹고 둘째는 영어 학원에 데려주어야 했다. 첫째는 집에 좀 더 머물다가 혼자 수학 학원을 간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서둘러 감자, 양파, 고기를 기름에 볶은 후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아내가 전날 만들어 놓은 시래깃국을 끓이고 반찬 몇 가지를 놓으니 그럴싸한 아침이 되었다. 잠깐 한숨을 돌리고 나니 아이들 깨울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 먹보 둘째는 어느새 밥 냄새를 맡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첫째 방에 가보니 코를 드르릉 골며 꿈나라에 빠져있었다. 몇 번 흔들어 깨워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들 일어나. 밥 먹어야지.”

“아이 됐어. 그냥 더 잘래. 짜증 나게 왜 자꾸 깨워!”


얼굴을 잔뜩 구긴 체 이불속으로 커다란 덩치를 숨겼다. 아니 이걸 그냥. 잔소리가 턱 밑까지 차올랐다. 아냐. 어제 분명 다짐했잖아. 밥 안 먹으면 배고픈 지가 손해지. 첫째를 그대로 둔 체 테이블에 가서 업무 개시를 시작했다. 그래도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고 머리에 물도 묻히며 어찌나 신경을 쓰는지 누구 잘 보일 여학생이라도 생긴 것인지.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수시로 연락이 오고, 오전까지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첫째가 급히 방에서 튀어나오더니 배고프다고 밥을 차려 달라고 했다. 쉬는 시간이 10분밖에 없다고 얼마나 재촉하던지. 안 먹겠다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밥을 두 번이나 차리게 만들다니. 카레와 국을 다시 끓이려는데 등 뒤에서,


“아빠. 카레 안에 밥을 넣고 같이 볶아줘. 그게 맛있더라.”

돌아보니 핸드폰 게임에 코를 박고 낄낄댔다. 얄미운 녀석. 그래도 원하는 데로 만들어 주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처리하고 나니 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첫째는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호빵이 먹고 싶다고 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동안에도 이미 온 정신은 게임 속에 있었다. 우연히 문틈 사이로 방안을 보았다. 한바탕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 벗어던진 옷은 방바닥에 내 뒹굴었고, 책상 위에 노트, 책 등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방 안에 서랍장이고, 거실 장은 왜 다 열어놓았는지. 정말 목구멍에서 불이 났다. 참을 ‘인’ 자를 계속 마음속에서 읊조렸다. 혼돈의 카오스에 빠진 첫째의 방을 원위치했다.


오후 늦게 첫째는 학원에서 돌아왔다.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러서 냉동실에 넣어 둔 핫도그를 간식으로 주었다. 다 먹고 남은 나무젓가락을 식탁 위에 고이 모셔두고 또다시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그냥 그런 한 마디였다. 게임 적당히 끝내고 숙제하라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은 말이었을까.

“아빠는 맨날 그 소리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말라고.”


그만. 더하면 아빠가 약속을 지킬 수 없잖아. 간절한 나의 바람과 달리 첫째는 결정타를 날렸다.


“아빠는 아빠 일이나 잘하셔.”


뭣이라. 문고리를 정확히 90도로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영화 곡성의 어린 딸에게 빙의되어 방언을 쏟아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첫째의 동공은 지진이 났고,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아뿔싸. 어제 한 굳은 결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머릿속에는 온갖 삼라만상이 떠돌아다녔다. 뒤늦게 후회해본 들 소용없었다. 이미 차가운 공기가 집 안 곳곳을 점령했다. 멀어진 틈을 좁히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중국 제품 없이 살기 불가능한 것처럼, 하루라도 잔소리 안 하고 살기 참 어렵네. 미션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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