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을 마치고 늦은 시각 집에 돌아왔다. 몸은 물기를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웠다. 얼른 씻고 아이들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아내와 첫째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알고 보니 학원에서 받은 수학 점수 때문이었다. 어째 공부 안 한다 했다. 불똥이 나에게까지 튈듯한 조짐을 느끼고 얼른 안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다.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때 문을 열고 둘째가 들어오더니 내 손에 딱딱한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뭐야?"
"아빠 쉿, 엄마한테 비밀이란 말이야."
뭘까 궁금했다.겉포장 같이 보이는 껍데기에는 붉은색으로 '아빠의 선물'이라고 적혀있었다. 아직 생일은 한 참 남았는데, 무슨 선물이지. 한 커플 벗겼더니 또 다른 포장지가 나왔다.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도 아니고 까도 까도 모르겠네.
앗. 정체를 밝힌 글이 보였다.
'선물이에요. 발렌타인데이 선물. 엄마가 주는 것 아니에요.'
얼마 전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못 받아 서운함을 비췄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걸 마음에 담고 이렇게 선물을 주다니. 부끄러움의 파도가 내 안에서 철썩거렸다. 둘째는 연신 소리를 낮추라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드디어 선물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는 핸드크림이었다. 아빠 손이 건조한 것은 어찌 알아서. 기특하여라. 용돈도 없는데 선물은 어떻게 샀을까.
둘째는 오래간만에 내가 좋아하는 반달눈을 가득 뜬 채, 뽀뽀까지 해주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선물을 보는 앞에서 서랍에 고이 넣었다.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안도한 표정으로 나를 꼭 안아주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마가 기분이 좋지 못한데, 아빠에게만 선물을 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타이밍을찾아 전전긍긍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깜짝 선물로 인하여 야근 독이 모두 풀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입이 근질거려 아내에게 말하고 싶은데, 비밀이라니 지켜야겠지. 이러다가 서랍 안에서 꺼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오늘 퇴근길에 마트를 들러야겠다. 둘째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듬뿍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