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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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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ug 29. 2019

놓고 온다.

“야. 거기. 공 좀 던져줘.”

뒤돌아보니 농구공 하나가 나에게 데굴데굴 굴러오고 있었다. 까까머리에 검은 피부, 흰색 안경을 쓴 2학년 선배가 운동장 저편에서 연신 공을 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서둘러 공을 집어던졌다. ‘와. 생각보다 엄청 무겁네. 왜 이리 거칠하지.’ 그렇게 나와 농구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축구였다. 중학교 입학 후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 끝나고 맨 날 남아서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였다. 밤늦게 땀 냄새 풀풀 풍기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의 잔소리와 핵 꿀밤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학기가 조금 지나면서 같은 반 친구 중 몇몇이 축구를 배신하고 농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체육부장인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우리 중학교는 근처 2개 초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중학교 입학 후에는 은근히 알력 싸움도 많이 했다. 알고 보니 저쪽 N 초등학교는 농구부가 있었다. N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이 농구를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체육 시간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운동장 한구석에서 농구를 하는 친구들이 보였다. 순간 화가 나서 일부로 그쪽으로 공을 세게 찼다. 공은 새처럼 날아한 아이의 허벅지를 맞혔다.

“야. 뭐야. 이쪽으로 공을 왜 차는데?”
“내가. 일부러 찼냐. 공이나 던져줘.”
“그러지 말고. 재호야. 지금 우리 인원이 안 맞는데 너도 같이 농구할래?”

살짝 흔들렸다. 사실 나도 전부터 농구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농구 보는 것이 취미였던 아버지 따라 농구장도 갔었고, 가끔 TV로도 농구 경기를 보았다. 그때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일본 농구 만화책 ‘슬램덩크’ 해적판이 돌았다. 정식 출판물도 아니어서 일반 만화책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크기였지만, 한번 보면 지남력을 상실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물론 나도 광팬이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농구시합에 참여했다. 슛은 연신 골대 근처도 가지 못했다. 오히려 친구들의 화려한 드리블에 넘어지기만 수십 번 했다. 몇 번 걷지도 안 했는데, 워킹이니 더블 드리블이네 하면서 내 공을 앗아갔다. 너무 분했다. 특히 우아한 몸짓으로 골대 근처로 날아가 공을 넣는 모습은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사람이 아닌 몸짓에도 반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나의 흑역사는 마음속의 뜨거운 불씨를 댕겼다.
 
슬램덩크 2회를 보고 그 슛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로 ‘레이업 슛.’ 농구에 농자도 몰랐던 주인공 강백호가 우연히 여주인공 소연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소연의 오빠가 주장으로 있는 농구부에 무작정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농구부에 정식 가입을 하였지만, 기초가 부족한 주인공은 연신 고전을 했다. 첫 시합을 앞두고, 소연과 함께 레이업 슛을 연습했다. 계속 실패하는 강백호를 위로하며 소연이가 강조했던 말이 있다. ‘놓고 온다.’ 강백호는 그 말을 맘속으로 외치며 드디어 슛을 성공시킨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 끝나고 농구장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쉽게 될 것 같았다. 골대 근처로 달려가, 오른발 한번, 왼발 한번,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공을 골대에 놓으면 끝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스텝이 꼬여서 골대를 지나치거나, 공을 너무 세게 던져서 골대 밖으로 튕겨 나갔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했다. 왜 안 될까. 너무 속상하고 열 받았다. 찬찬히 눈을 감고 슬램덩크를 떠올렸다.

가볍게 힘을 빼고 ‘놓고 온다.’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눈가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나의 온 정신을 골대로 집중시켰다. 한발 한발 골대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첫 스텝을 밟았다. 느낌이 좋았다. 왼발을 내딛고, 드디어 오른손을 골대로 뻗었다. 최대한 힘을 빼고 시계 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공을 골대 오른쪽 중간 위치에 놓았다. 공은 개구리 점프하듯 골대에 튕겨 뱅그르르 두 바퀴를 돌고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얏 호!”

나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리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처음 성취감의 짜릿한 맛을 보았다. 물론 이어지는 시도에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았다.  농구 규칙을 알게 되고 기술이 익숙해져 즐기는 수준까지 갔을 때 레이업 슛은 나의 큰 무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체육대회, 대학교 3 × 3 시합, 직장인 농구 대회 등 수많은 경기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얼마 전 이제 막 농구를 시작한 초등학생 아들과 농구를 함께 했다. 중년이 되어서부터는 마음 같지 않은 몸 때문에 혹시나 다칠까 봐 농구를 안 했었다. 하지만 아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함께 슛 연습하던 중 아들이 레이업 슛을 알려달라고 했다. 기본 동작을 알려주고는 저만치서 지켜보았다. 아들은 연신 실패를 하면서도 열심히 슛을 연습했다. 그 순간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레이업 슛을 연습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만화 슬램덩크 속 '놓고 온다.'를 생각하며 처음 슛을 성공했던 그때. 그 흥분은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내 심장을 울린다.

처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서 성취했던 기억. 점차 감각들이 무던해지는 중년으로 가는 길. 그 짜릿함만은 절대 잃고 싶지 않다.

언제나 나의 첫 시작은 ‘놓고 온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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