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람 냄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배 Sep 01. 2019

팔불출 통영 가다.

8명 아재의 여행기

8명의 아저씨가 통영으로 떠났다.

대학 때 이후로 남자들끼리 떠난 여행은 처음이었다. 처음 형들에게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아내에게 허락받는 것도 걱정되었고 형들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여행 사실을 알렸고 예상보다는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여행지가 통영이었는데. 전부터 무척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지가 통영이라 결정이 좀 더 수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통영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실 우리 8명은 대학원 선후배 사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막내였다. 우리 중에 유일하게 박사과정이었고 마음씩 좋은 큰 형님 동수형. 늘 부지런하고 사람 잘 챙기는 엄마 같은 재민형. 대구에서 생활하다가 큰 물에서 놀고 싶다고 서울로 올라온 박력 있는 형욱형. 술을 너무나 사랑해서, 낮보다는 밤에 훨씬 에너지 넘쳤던 주현 형. 운동중독으로 몸은 육체미 선수 뺨치지만 마음은 여렸던 민수형. 신부님이 되기 위해 사제의 길을 가다가 세상의 호기심을 버리지 못해 그만두고 온 태호형, 우리 중에 가장 마음씨도 여리고, 자정만 되면 잔다고 해서 신데렐라라는 별명이 붙은 수홍 형. 그리고 졸업 후 회사생활은 안 맞을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으로 마음공부하러 온 나. 이렇게 범상치 않은 이력을 가진 우리 8명은 여자들이 가득한 상담대학원에서 소수의 남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연스레 뭉쳐야만 했다. 함께 의지하고 지내다 보니 대학원 시절 내내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자주 모여 술도 마시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나누었다.

대학원 졸업 후엔 형들 모두 심리 상담가의 길을 가고 있다. 나도 상담가의 길을 가다가 중간에 진로를 변경하여 회사원이 되었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해서 자연스레 거리를 두었다. 매년 있었던 모임도 잘 나가지 않았다. 만나면 나만 덩그러니 섬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상담을 할 수 없는 내 상황에 대한 질투심이었을까. 나 스스로 벽을 만들었다. 그렇게 7~8년이 흘렀다. 그런데 여행이라니. 얼떨결에 간다고 했는데 겁이 났다. 어색하면 어쩌지.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에 밤 11시에 모이기로 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은 자정이었다. 미리 만나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평소에 시간을 칼 같이 지키던 내가 밤 11시 반이나 되어서야 도착했다. 집에서 미적대다 지각을 하였다. 심리적 저항 현상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형들은 환한 미소로 날 맞아주었다. 대학원 시절로 돌아간 듯 웃고 떠들며 심야 버스를 기다렸다. 금세 마음의 벽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버스터미널에는 저마다 여행의 흥분을 주체 못 한 사람들의 밝은 기운이 가득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검게 물든 풍경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처음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주체 못 했다. 중년 나이의 주책이다.

새벽에 도착해서 간단히 해장국을 먹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1월의 통영은 무척 추웠다. 서둘러 연화도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작년에 주현 형이 연화도를 다녀왔었다. 형 말로는 등산길도 예쁘고, 산 정상에서 보는 용머리 해안의 경치가 정말 멋지다고 했다. 기대가 많이 되었다. 나는 왼손에 충무김밥과 오른손에 시래깃국이 든 검은 봉지를 든 체 배를 탔다. 막내의 숙명이란 늘 그렇지 뭐. 배 안은 참 신기했다. 좌석은 없고, 자면서 갈 수 있는 넓은 온돌 마루가 있다. 초췌한 남자 8명이 두꺼운 잠바를 베개 삼아 쪽잠을 청했다. 그 모습이 참 가관이었다. 딱 봐도 노숙자 같았다.

 “드르릉. 쿵. 쾅. 뿌드득”

곳곳에서 코 고는 소리와 이가는 소리가 전쟁 난 듯 들려왔다. 장난꾸러기 태호형이 그 소리를 녹음해서 여행 도중 간간이 들려주었는데 빡빡한 여행의 엔도르핀이 되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잠시 근처 대기소에 머물러 추위를 녹였다. 선착장에는 고무 드럼통을 거꾸로 한 코스 안내판이 있었다. 우리는 그중에 조금 쉬워 보이는 연화봉으로 시작하는 A코스를 선택했다. 그리곤 서둘러 산 정상으로 향했다.

산은 생각보다 높았다. 좁은 숲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조금씩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얼음장 같은 바람에 내 손에 든 충무김밥도, 국도 차갑게 식었다. 잠시 쉴 겸 산 중간에 대충 자리 잡고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비닐봉지가 연신 날아가고 손이 시려 워 김밥도 잡기 힘들었다. 그렇게 낑낑대며 식은 밥을 먹는데,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상으로 가는 도중 출렁다리에서 나란히 사진도 찍고 1시간 여의 힘든 등산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바위에 앉아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았다. 용머리 해안의 전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넓고 푸른 바다를 금빛 햇살이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주변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예전 미국 출장에서 워싱턴 기념탑이 햇살을 받아 호수 한가운데를 금빛으로 수놓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아니, 비교도 안 될 만큼 고매했다.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에 압도된 느낌이 들었다. 서로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머물다 내려왔다.

우리는 날 밤새고, 내내 걷고. 몸이 많이 지쳤다. 무엇보다 배가 매우 고팠다. 여행을 인도했던 재민형이 저녁으로 다찌집을 예약했다. 수요 미식회에도 방영되었다는 ‘물보라 다찌’ 집이다. 마치 70년대 영화 제목 같다. 들어가 보니 역시 사람들로 바글댔다. 다찌는 술을 주문하면 그 술값에 따라 안주가 따라 나오는 시스템이다. 빨간 통 안에 맥주와 소주가 가득 담겨왔다. 안주는 더없이 풍성했다. 제철의 회와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문어와 소라, 전복, 조개, 털게 등등 끊임없이 먹거리가 상을 가득 채웠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대학원 시절 얘기부터 사는 얘기, 가족 얘기 등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유머 가득한 형들 덕분에 하도 웃어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어떤 유치한 말을 해도 언어유희로 승화되었다. 이렇게 편하게 웃고 떠들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회사에서는 중간 위치로 늘 위, 아래를 살펴야 했다. 행동과 말은 점점 신중해졌다. 답답한 가면을 벗고 유치 찬란한 진정한 ‘나’로 돌아왔다. 한참을 웃고 떠드는 중 제일 큰 형님인 동수형이 화두를 던졌다.

“이제 막내도 들어와서 완전체가 되었는데. 우리 모임 이름이라도 짓는 게 어때?”

갑자기 진지한 분위기로 열심히 이름을 찾았다. 그러던 중 수홍 형이

“우리 모습이 참 팔불출 같지 않아?”

라고 얘기하는 순간 모두 시선 집중.

“팔불출? 여덟 명의 못난이 이들. 딱 우리네!”

만장일치로 통과. 이제 우리는 팔불출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마음의 설렘은 여전했다. 그동안 나는 왜 거리를 두었을까. 바보 같은 생각으로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웠다. 다시 찾은 소중한 인연을 이제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또 다른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팔불출’ 다음 여행지가 벌써 궁금하다. 하긴 뭐. 어디든 어떠랴. 형들과 함께라면. 팔불출 아재의 통영 여행. 나에게는 해방감 이상의 그 무언가를 선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놓고 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