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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09. 2019

불청객

어제 씻고 머리를 말리던 도중. 무심코 거울 앞에서 오른쪽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 머릿속에 하얀 물체를 보고 기겁을 했다. 바로 흰머리가 한 움큼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이상하다. 며칠 전만 해도 한 두 가닥 보일락 말랑했는데. 이놈들이 나도 모르게 내 집에 떡하니 무단 침입하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보. 여기 봐봐. 흰머리 보이지?"
"아이고. 뭐 그리 호들갑이야. 보이지도 않구먼."
"아냐. 자세히 봐봐. 엄청났어."
"겨우 고거 가지고 그래. 나는 벌써 한 가득이야."

하긴 뭐. 이제 40대 중반을 향해가고 있는데.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늦은 걸 수도 있다. 유전인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흰머리가 늦게 나셨다. 그래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제 나이 듦으로 한없이 달려갈 것만 같았다. 요즘 부쩍 잠도 일찍 깨고. 안 자던 낮잠도 잔다. 오른쪽 무릎은 조금만 운동해도 시큰거렸고 전보다 덜 먹는데도 뱃살은 자꾸 앞으로 나가고 있다. 안경도 썼지만 가까운 글씨가 점점 멀어진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싫은데 아직은.

요즘 뒤늦게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보고 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사용한 20대 딸이 폭삭 늙어 70대 할머니가 된 이야기이다. 이제 앞부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운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조금씩 자기 상황을 이해하고. 그 나름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만약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순간 아까 흰머리를 보고 마주친 공포와는 또 다른 공포가 느껴졌다. 치열하게 취업 준비를 해야 하고. 몇 번의 연애 실패를 겪어야 하고.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막막해야 하고. 군대도 다녀와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신체적 젊음은 주어지겠지만. 다시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들을 생각해보면서. 그런 질문이 다가온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름 지금 늙어감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까짓것 머리야 염색하면 되고. 무릎이야 운동 덜하면 되고. 뱃살이야 인격이라 생각하면 되고. 노안이야 다초점 안경 있으니. 물론 지금 삶도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기는 매  한 가지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안정적인 삶인 것은 분명하다.

20대 때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었고. 30대에는 40대가 오지 않길 바랐다. 지금 40대가 되니 20대가 되고 싶지 않네. 무슨 변덕도 아니고. 일관성이 없긴 하다. 하지만 결국 지금 나이가 나름 괜찮다는 결론을 나 스스로 내렸다.

흰머리가 나 없을 때 친구들 데리고 우리 집에 허락 없이 오는 것은 심히 불쾌하지만. 앞으론 내색 안 하고 맞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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