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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11. 2019

겨울 밤기차 - part 1

민수를 따라 우르르 술집으로 들어갔다. 바싹 긴장한 우리와 달리 민수는 여유가 넘쳤다. 사장님과 눈인사를 하고 어둑한 구석으로 인도했다. 군데군데 얼룩지고 해진 의자 시트가 세월을 가늠케 했다. 쾌쾌한 곰팡내가 연신 코를 찔렀다. 민수는 제집 마냥 익숙하게 술과 안주를 시켰고 몇몇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술잔을 돌렸다.

수능이 끝난 얼마 뒤. 학교는 연이은 자습이었다. 시험을 폭삭 망친 나는 원했던 대학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진학 상담에서 담임이 정해준 적당한 대학을 선택했다. 매일 학교에 간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날도 멍 때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담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민수가 교실 앞으로 나갔다. 그리곤 쫑파티를 제안했다. 민수의 말에 반 전체가 술렁였다. 고3이 시작되면서 서로가 적이었다. 경쟁 속에서 숨 한번 편히 쉬기 어려웠다. 모두 찬성했다. 일정은 민수와 그의 패거리가 도맡았다.

왁자지껄 술판이 벌어졌다. 술잔 속에 미래를 담아내듯 무섭게 퍼부었다. 나도 무거운 마음을 덜고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술맛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하게 취했을 무렵 다 말라비틀어진 돈가스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기름진 음식 덩어리가 위에 닿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골목을 찾아 들어가 급하게 음식물을 게워냈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추위가 두툼함 점퍼를 지나 속살까지 닿았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었다. 휘청거리며 술집 앞에 다다랐을 무렵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태호였다.

"안 들어가고 거기서 뭐 하냐?"
"어..., 재호구나. 그냥. 뭐. 바람 좀 쐬려고."

범생이 녀석. 성적은 나보다 늘 몇 등 아래였는데 이번 수능에서 대박 났다. 애써 마음을 감추려 했지만 내게는 보였다. 그 기쁨에 질투가 났었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솔직히 화가 났다.

술 한잔 제대로 안 마셨는지 붉은 내 뺨과 달리 유난히도 하얗다. 그대로 지나쳐 술집 문을 밀려던 순간

"바다 보러 갈래?"


나는 술집 문을 붙잡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맨손에 느껴지는 차가움을 인지할 때쯤 뒤를 돌아보았다. 거짓 없는 눈동자였다.


조금씩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서울역이요."

서울역이란 단어가 이렇게 가슴 설레는 말이었나. 금요일 밤 배합 실은 사람들로 바글댔다. 강릉 가는 열차는 모두 매진이었다. 입석 두 장을 끊었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태호는 신문지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녀석도 참.

밤 11시가 다 되어 열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 우리는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나란히 앉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야 취기가 몰려왔다. 술을 깰 겸 쓱 일어나 차장 밖을 쳐다보았다. 세차게 내리는 눈 속에 어둠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우리는 낭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제법 요령이 생겼다. 내리는 사람을 피하고자 옮겨 다닐 필요 없이 반대편 계단으로 자리 잡았다. 겨울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열차에 내려 어디로 가야 할까. 모든 말과 단어는 합쳐져 거대한 눈덩이가 되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 꼬질꼬질한 술집에서 이제 강릉 가는 열차 안에 있다. 그래 가는 거야.

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낭만의 촛불이 점차 그 불빛을 잃어갔다. 문틈 사이로 칼바람이 불어왔다. 바싹 몸을 붙여보지만 소용없었다. 추위가 뼛속까지 느껴졌다. 점점 말을 잃어갔다. 추위를 이겨내주던 든든한 어깨가 열차의 덜컹거림에 부딪힐 때마다 불쾌함이 되었다. 급기야 밀려오는 그것에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to be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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