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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12. 2019

겨울 밤기차 - part 2

"왜 그래?"
"자꾸 어깨로 치니깐 짜증 나잖아."
"내가 일부러 그랬냐?"
"됐다. 따라온 내가 바보지."

우린 열차의 덜컹거림 같았다. 침묵만 남았다. 속은 매슥거렸다. 애써 잠을 청해 보아도 불편한 자리로 인해 잠이 쉬 오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잠시 마비되었었나 보다. 누굴 탓하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호는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뽀얀 얼굴이 아기처럼 고왔다. 마냥 미워할 수 없는 녀석. 어깨 한쪽을 완전히 내준 체 나도 조금씩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역은 강릉입니다. 열차가 완전히 멈춘 후 하차해주시길 바랍니다."

잠결에도 '강릉'이라는 단어가 선명했다.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태호를 깨웠다. 개찰구를 통과하니 차가운 바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직 어둠이 남아있는 세상은 고즈넉했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를 만나러 강릉에 오곤 했었지. 출구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면 늘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반가움 뒤에 따라오는 어색함. 그 자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뜨거운 국밥에 연기가 모락모락 퍼졌다. 술이 깨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뜨끈한 국물에 밥을 얹어 입에 넣으니 뱃속까지 평온해졌다. 짜증도 금세 사라졌다. 한껏 찌든 서로의 모습이 재밌었다.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무 계획 없이 그 한마디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넘치는 젊음을 주체 못 한 것인가.

바다를 보러 가자. 주머니를 털어보니 5만 원 남짓한 돈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회비도 못 내고 나왔다. 민수와 그 패거리의 욕지기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린 어디쯤인 것일까. 조금씩 어둠이 걷히고 햇살이 주변을 밝혔다.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뚜벅뚜벅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도 버스 정류장이 보이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경포대로 가주세요."

끝을 알 수 없는 파란 물결. 바다는 파도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래사장 아무 데 나란히 앉았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그간 나를 짓누르던 미래의 불안은 잠시 내려놓았다. 1년이었다. 좁은 닭장 같은 공간에서 단 하루를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그 하루는 끝났다. 이제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바다에 답을 물어도 하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긴 시간 침묵을 사유했다. 우리에겐 이런 정리의 의식이 필요했나 보다. 어찌 보면 술집에서 태호의 한마디는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결말이 정해진 드라마처럼 경포대로 왔다.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삶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이것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시험 예상 문제가 아니었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만 생각이 교차하는 나와 달리 태호는 미동도 없었다. 설렘일까 불안함일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모르겠다 어떤 녀석인지. 늘 표현에 신중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저만치 떨어졌다. 몇 번 경험하고 나서 나도 그 거리를 유지했다. 하긴 그 시간조차 사치였다. 1년을 같이 생활해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1시간 남짓 시간이 지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일어났다. 덕지덕지 붙은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고 잠시 바다 주변을 돌았다. 그때였다. 지평선 끝이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불그스름한 미완성의 태양이 서서히 도약을 시작했다.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라대로 다르게 변해갔다. 그 빛의 오묘함에 끝도 없이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내내 잠에 취했다. 열차에 내려 잘 가라는 한마디로 그날을 정리했다. 나를 흔들던 파도는 잦아들었다. 그저 주어진 인생길을 따라갔다.


언젠가 그 하루를 글에 담고 싶었다. 출근길에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묵은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졸업 후에 태호와는 연락이 끊겼다. 가끔 바람에 흘러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마저도 오래되었다. 어딘가에서 나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가겠지.

우리가 함께했던 그 하루는 그렇게 추억 속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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