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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야금 늙어갈 때, 몰래몰래 크고 있는 너

언제 이렇게 컸을까.

by 실배

어느 순간 돌아보면 아이는 불쑥 커있다. 어제 재택근무 중 둘째를 관찰했다. 일부로라기보다는 상황적으로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출근하는 엄마를 배웅했다. 그러고는 펜을 잔뜩 가지고 거실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끔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평가를 묻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답했다가는 불호령이 예측되기에 살짝 조미료를 넣어 말해주었다.


어느 틈엔가 안 보기에 찾아보니 안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그런 듯 익숙했다. 그러더니 또다시 호출. 배가 고프니 밥을 챙겨달라고 했다. 메뉴는 계란밥을 주문했다. 패드로 옛날 드라마를 보며 헤헤 호호. 그러다 밥 반 공기를 추가로 요청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 어느새 파란 원피스로 갈아입고 옆에 앉아 거울을 연신 들여다보았다. 예쁜 표정을 왜 짓는지 이해 불가였다. 어느새 곱게 빗어 올백 머리를 만들었다. 마무리는 파란색 머리띠였다. 나를 바라보며 어떠냐고 물었다. 잔머리가 몇 가닥 보이기에 사실대로 말했더니, "칫" 하고 흘겨보았다. 다시 머리를 다듬고 재차 물었다. 말 대신 엄지 척을 했다.


자리에서 "학원 잘 다녀와"라고 말했더니, 엄마는 현관까지 나와 배웅한다고 콕 집어 말했다. 무서운 엉덩이를 이끌고 문 앞에서 한번 안아주고 보냈다. 연신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답했다. 사실 40분 뒤면 다시 볼 텐데, 남들이 보면 어디 멀리 간 줄 알겠네. 집돌이 첫째가 잘 있나 방에 가보니 대자로 누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 빈틈이 보이기에 옆구리 간지럼을 시도하다 쫓겨났다. 종일 방에서 답답하지도 않은지 원.


업무망을 켜고 일에 집중하던 중 둘째가 집에 왔다. 가방은 거실 한편에 대충 던져 놓고, 에어컨 앞에서 땀을 식혔다. 조금 있다가 구수한 냄새가 나길래 보았더니 냉동실에서 주먹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있었다. 그리곤 피아노 앞에 앉아 뚱땅거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음계가 맞는지도 물어보고, 연주에 심취했다. 악보에 적힌 글과 숫자를 보니 숙제 같았다. 숙제도 척척 잘하네.


밖에는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둘째는 피아노 학원을 갈 시간이 다 되었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문 앞까지 나가 우산을 챙겨주었다. '그래. 이거지'하는 흐뭇한 미소를 보냈다.


첫째도 학원을 가고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낼 때쯤 아내가 돌아왔다. 커피를 타서 식탁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 둘째가 많이 큰 것 같아. 오늘 보니 혼자서도 잘하네."

"몰랐어? 얼마나 많이 컸는데. 맨날 늦게 오니 알 턱이 있나. 쯧쯧."


그러게. 내가 야금야금 늙어갈 때, 아이들도 몰래몰래 크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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