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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ug 12. 2023

연애, 그거 먹는 거야?

연애소설을 써보라는 아들의 일침

글태기가 분명해. 노트북 앞에 서면 새까만 암묵 커튼을 쳐 놓은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젖은 수건을 꽉 쥐어짜 한 방울이라도 글로 만들어 보지만 잠시 뿐 그 긴 시간 동안 네모난 화면을 바라볼 뿐이다.


그래 이유는 있다. 새로 발령 난 곳의 살인적인 업무량 거기에 왕복 3시간 동안 걸리는 출퇴근은 잔뜩 방전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머릿속에는 '오늘은 써야지' 하면서도 몸은 '무리야'를 외친다. 주말엔 그간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시간이 없다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댄다.


지난 주말 아내와 딸은 장모님이 계신 문경으로 떠났고, 할 일 없는 사내 둘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해 질 녘 더운 공기를 밀어낸 선선한 기운이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극장으로 가던 길, 녀석의 요즘 넋두리를 듣다가 이젠 나의 글태기 고민을 털어냈다.


"아빠, 맨날 그저 그런 일상글만 쓰니깐 그렇지. 소설을 써봐."

"일상글도 잘 못쓰는데 무슨 소설이야?"

"내가 정해줄게 연애 소설을 써봐."

"연애? 그게 뭐야? 먹는 거야?"

"썰렁해."


생뚱맞게 소설이라니.  더구나 연애소설. 오호라 요즘 소설책 좀 보았다는 거지. 하지만 아빠는 연애를 안 한지 벌써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데. 기억을 더듬거려 써보아야 하나.


가만, 몇 년 전 끄적이던 내용이 있긴 했다. 삶이 공허한 남자와 아픈 상처를 지닌 여자가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져드는 이야기였다. 한 세 페이지 정도 썼다가 하필 노트북이 고장이 나서 날려 버렸다. 세세한 단어나 문장은 흐릿하지만 전체 구성만은 또렷했다.  


이어서 써볼까나. 아니야. 내 주제에 무슨 소설이 이라니. 아니지. 당당히 써서 녀석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 가만있자.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초여름이 시작되었던 그 해의 풍경,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나 느꼈던 감정, 다가올 운명을 예측하지 못한 채 세상을 밝게만 물들였던 때.


상상만으로도 왼쪽 가슴 어디메가 콩닥거렸다. 뭐지. 손마디가 찌릿하고 화끈거리는 볼때기는. 이러다 쓰기도 전에 활활 타버리려나. 미쳤어. 주책이야. 아직 나에게도 연애 세포가 남아 있던 걸까. 대지 저 아래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느꼈다.


하긴 며칠 전에도 하늘이 붉게 변한 순간, 그 자리에서 주체 못 하고 한참 동안 머물렀다. 종량제 봉투를 사 오라는 아내의 지령도 잊은 채.

감성을 마구 북돋아준 풍경

감성은 단지 작아질 뿐, 절대 소멸되지 않는다. 이제부터 특훈이야. OTT 연애 드라마도 보고, 연애 소설도 읽어봐야지.  솓아라, 아라 연애 세포들아.


내 기필코 소설 한 편을 완성하여 녀석 앞에 내보이리라.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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