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걱서걱' 왼팔에 스치는 풀이 내는 소리가 온몸 가득 전해졌다. 오던 길을 되돌아 이번엔 오른팔에 그 감촉을 느껴보았다. 하늘은 더없이 깊고 푸르르지, 선선한 바람은 불어오지, 괜히 서성이며 발길을 떼지 못했다.
삭막한 도시에서 만난 반가운 우연은 과거의 기억까지 소환했다. 내가 참 좋아했던 것들. 세월이 겹겹이 쌓여 이제는 가물한 순수했던 기억의 조각들 말이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주택이었다. 지금처럼 늦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찾아올 때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 나를 발견하곤 한없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똘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따스한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나는 똘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정처 없이 떠다니고 어머니가 심어 놓은 이름 모를 꽃들이 파르르 바람에 흔들리며 계절이 변하는 그 신비로운 순간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그 순간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불안마저도 모두 풍경 속에 사드러 들었다.
집 안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서재방 창틀 안이었다. 왜 그렇게 그 공간을 넓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아이가 쏙 들어갈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을 발견하면 습관적으로 서재로 향했다. 책장에 아무 책이나 꺼내 그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이야기 속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잠시 딴짓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했다.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던 나에겐 그곳은 찐 친구가 되어 주었다. 몸이 커져 더는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때 그 아쉬움이란.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동네 뒷동산.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동산이라 하기엔 제법 높이가 있어 어중간했다.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사랑했던 나는 틈만 나면 그곳에서 뛰어놀았다.우연히 방방이 아저씨라도 찾아오면 타탁거리는 정전기를 느끼며 하늘 끝까지 뛰어올랐다. 잠자리채 하나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곤충을 채집했다. 그러다 아카시아를 만나 꿀도 쪽쪽 빨아먹고, 거대한 해바라기에 몸을 숨겨 숨바꼭질도 했다.
틈 만 나면 친구들과 그곳으로 향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연락 없이도 모이는 공간이요 아지트였다. 어느새 동산이 깎이고 파이더니 중학생이 될 무렵 덩그러니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도 가끔 그곳을 지날 땐 아스라한 추억 하나가 가슴을 때린다.
삶이 그리 가슴 뛸 일이 없는 중년이 되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지도 모를 숨 가쁜 하루를 보내며 무뎌진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곤 한다.
그랬던 내게도 요즘 좋아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퇴근하고 집에 다다를 때쯤 만나는 불그레한 노을이다. 지하철 출구를 나가면 펼쳐지는 그 아름다운 광경에 그대로 물들 곤 한다.
그때부터인가 불쑥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면 무언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평온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