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타나 봐. 맑은 하늘과 반비례한 어두컴컴한 내 안은 깨울 무언가를 원하고 바랐다. 그때였다. 오랜 선배에게서 카톡이 왔다.
"날 세. 요즘 날이 참 좋아. 공지천에 자전거 함 타러 올 테야?"
"정말요. 당장 갈게요."
세상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고 믿는다. 지금 내 마음이 그 끈을 타고 춘천에 있는 선배에게까지 전해졌음이 분명했다. 짐을 싸는 동안 달처럼 차오르는 흥분을 주체 못 했다.
일요일 16시 19분 용산 출발, 17시 30분 남춘천역 도착. Itx 청춘 열차표를 끊고 그 시간만을 기다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딸은 나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설렘을 느꼈나 보다.
"아빠. 뭔 일 있어? 왜 이리 좋아 보여."
"응. 아빠가 선배 만나러 춘천에 가기로 했어."
"닭갈비 먹으러?"
"응. 닭갈비도 먹고, 자전거도 타려고."
"좋겠다!"
"다음에 우리도 꼭 가자."
문 앞에서 온갖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배웅하는 딸을 뒤로 한채 길을 나섰다. 용산역에 도착해서 열차를 기다렸다. 가방은 저만치 놓아두고.
도착한 열차 안에선 창밖의 풍경도 담고 최윤석 작가의 신간 '달의 아이'도 읽었다. 1시간여의 시간이 흘러 남춘천역에 도착했다. 서울보다 싸늘한 기온에 옷깃을 여몄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드디어 선배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하늘은 이미 붉은빛으로 갈아입었다. 춘천에 왔으니 닭갈비를 먹어야지 하며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닭갈비라는 단어만으로도 몹시 허기졌다. 지글지글 고기 익는 냄새에 소맥을 말아 건배와 함께 한 홉에 들이켰다. 목이 탔다.
인생은 참 신기하다. 5년 전 선배를 만나러 간 후 우리는 서산과 과천으로 긴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번에 선배는 다시 춘천으로 나는 서울로 발령 났다. 그 사이 이마에 주름은 자글, 머리에 새치는 늘었다. 우리가 만나면 좋은 건 그 흔한 주식, 골프 없이 글과 책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2차로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관사로 향했다. 참 깔끔한 선배답다. 누가 남자 둘이 살고 있다고 믿을까. 분명 선배의 취향이 반영된 곳곳의 초록이들. 빈티지 느낌 물씬 풍기는 소품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술과 이야기를 나눴다. 깊고 푸르른 밤은 그렇게 끝을 모르게 계속되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깼다. 문을 열고 나가니 선배가 아침을 차려 놓았다. 큼지막한 계란프라이, 된장찌개, 그리고 밑반찬들. 대충 만들었으니 그냥 먹으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나하나 맛깔났다. 조미료 하나 쓰지 않았다는데. 이쯤 되어야 객지 생활도 할 수 있나 보다.
옷을 갈아입고, 천천히 라이딩을 시작했다. 전 날 맑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하늘이 찌뿌둥했다. 시원한 바람을 가로질러 공지천 초입에 들어설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옅은 비는 갈수록 짙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길을 막을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가 와서 시원하고 좋았다. 많이 쏟아지면 잠시 나무 밑에서 피하면 그만이었다.
정확히 5년 전 그 길을 따라갔다. 몸은 까맣게 잊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반가움에 패탈에 힘을 냈다. 오래간만에 탄 자전거로 엉덩이, 허벅지 모두 뻐근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라이딩 2시간 반 만에 점심 식당에 도착했다. 선배가 어제부터 이야기한 추어탕집이었다. 예스러움이 가득한 내부는 맛집 포스가 느껴졌다. 뜨끈한 국물은 으스스한 몸을 녹였다. 김치와 깍두기를 리필하며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밥을 든든히 먹었으니 커피가 빠질 수 있나. 또다시 선배의 손에 이끌려 예쁜 카페에 도착했다. 넓은 정원에 사람들이 뛰놀고 4층 규모의 널따란 곳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대표 메뉴라는 아인슈페너를 선배는 따뜻한 라테를 주문해서 뷰가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때로는 경치를 바라보며, 때로는 침묵하며, 또 때로는 진진한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공지천의 고즈넉한 모습을 눈에 담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관사에 도착해서 씻고 떠날 준비를 했다. 선배는 아쉬운지 좀 더 있으라는데. 얼마 남지 않은 열차시간 때문에 길을 나서야 했다. 선배는 슬리퍼를 신고 정거장까지 배웅했다.
저 멀리 버스가 다가올 때쯤, 선배가 말했다.
"마음 답답할 땐 또 놀러 와."
"그럼요."
"덕분에 즐거웠네."
씩 하고 웃는 미소와 흔드는 손을 뒤로 한채 버스에 탔다. 나를 흔들던 가을은 그렇게 춘천에 놓아두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