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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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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an 30. 2020

기억한다.

수증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퍼진다. 작고 마른 아이는 따듯한 탕에 들어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린다. 몸은 한껏 앞으로 숙여 양팔 모두 차가운 대리석에 내놓았다. 오른손에는 환타 오렌지 병을 들고 기다란 빨대로 힘껏 빨아들인다. 목젖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움이 탕의 뜨거움과 대비되어 묘하게 상쾌하다. 아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오라는 손짓을 보낸다. 아이는 귀찮은 듯 몇 번 무시하다 마지못해 탕 밖으로 나간다. 아까의 미소는 사라진 체 뾰로통 입이 나왔다. 그때였다. 아이 발이 바닥 홈에 걸리며 균형을 잃은 순간, 덜컥 오른손에 들고 있던 환타 병이 날아간다. 마치 슬로 모션을 보는 것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그대로 바닥에 흩어졌다. 적막한 탕 안에 찢어질 듯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이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체 그대로 서 있다. 눈가에 조그만 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물줄기가 쏟아진다. 파편 조각이 모두 가슴에 박힌 듯 아팠다. 목욕탕 관리인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아이에게 다가간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그 사내와 아이의 아빠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아이는 생각한다.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 장면이 기억난다. 그때 처음 두려움, 불안이란 감정과 맞닥뜨렸다. 나는 지금도 불안 수준이 높다. 별일 없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 일어날 듯 불안할 때가 있다. 그래서 계속할 일을 만들어 쉴 틈을 주지 않는다. 불안의 근원이 그때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거의 40여 년이 다 된 기억이 또렷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정말 그때는 그대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언젠가는 이 기억을 글로 담아내고 싶었다. 사진 기억처럼 절대 지울 수 없는 그 순간. 트라우마라는 거창한 표현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기억을 기록하며, 지울 수 없음을 알았다.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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