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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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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13. 2020

농땡이.

오래간만에 평온함이 찾아온 날이었다. 이럴 땐 농땡이가 딱 맞다. 눈치껏 티 나지 않게 내 시간을 사유했다. 얼마만의 여유일까. 업무 특성상 급박하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지금은 전보다 덜한 긴장감이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도 같다.

무사히 오전 보내고 점심 후에 여전한 오후를 맞이했다. 오늘따라 전화도 안 왔다. 문득 엊그제 본부로 파견 온 동기 생각이 났다. 메신저로 차 한 잔 하자고 했다. 옆 부서 동기와 함께 셋이서 만났다. 온 지 3일밖에 안 되었는데, 얼굴이 노랗게 떴다. 그 얼굴에 예전 내 얼굴이 비쳐 웃펐다. 일선과는 다른 속도에 힘들어 죽겠다는 동기의 투정이 이어졌다. 이곳 근무가 처음이라 긴장 많이 되고, 정신없을 것이다. 나야 뭐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시간이 해결해주리란 뻔한 말뿐이었다. 점차 동기 얼굴 속에 편안함이 찾아왔다. 역시 수다가 만병통치약이다.

더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눈치 보일 것 같아 보내야 했다. 다시 슬픈 사슴 눈이 된 그 친구를 보내며 우물가에 내놓은 엄마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내 코가 석 자인데 팔자 좋게 남 걱정하고 있다. 월급루팡 저지하겠다고 찾아온 간단한 몇 가지 일 처리했다. 다시 농땡이 모드 켰다. 눈은 모니터 응시하고 손은 키보드 위에 놓았지만, 정신은 안드로메다에게 있었다. 벌써 짧은 시곗바늘은 4를 넘어 5에 다가가고 있다. 그래. 조금만 버티면 돼. 그간 정신없는 날에 대한 보상이야. 이런 날도 있어야지.

띠링 메모 하나 잽, 띠링 메모 둘 어퍼컷, 띠링 메모 셋 카운터 펀치, 띠링 메모 넷 녹다운. 연달아 메모 4개가 찾아왔다. 공포의 보고서 작성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작년 1년간의 업무를 모조리 담아야 한다. 슬쩍 흩어보았는데, 주말에도 나와야 할 각이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잘 풀린다 했다. 처음 전입해서 뭘 할지 몰라 어리바리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신 계장. 그냥 가만있어. 가만있으면 일이 알아서 찾아올 거야."

바로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여전히 다른 별을 헤맸다. 이 시간이 파괴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 오늘 하루쯤 그냥 보낸다고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잖아. 내 안의 합리화 기제가 마구 솟아났다. 슬며시 메모 오른편에 있는 'x'를 눌렀다. 하나둘 내 앞에서 사라져 가는데,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6을 향해 열심히 뛰어갔다. 나는 관중이 되어 시계 선수를 응원했다. 조금만 힘을 내줘. 넌 할 수 있어. 이제 다 왔어.

나의 응원 덕분인지 무사히 결승점에 도달했다. 고로 나는 오늘 농땡이 제대로 쳤다. 야호!

내일은.... 내일은 뭐. 오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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